교육 이대로 둘것인가 <8>|"진도 못나가니 질문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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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입 D-66일. 일사각오로 1점을 쟁취하자.」입시구호를 큼직하게 게시판에 써 붙인 대구시 A고교3학년6반 교실 3교시 영어시간.
수업시작 종이 울리기 무섭게 Q교사(45)는 영어 총정리 문제집을 꺼내 문제 하나 하나를 총알처럼 풀어나가는 도중 한 학생이 『저 선생님, 6번째 문제의 문장구조가…』하며 질문하려하자 수업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순간 교실 안의 나머지 학생 55명의 따가운 시선이 그 학생에게 주저없이 쏠렸다.
학생들의 눈총은 『모르면 집에 가서 과외선생이나 참고서를 보고 공부하면 될 것이지 55명의 수업진도를 너가 무슨 권리로 막느냐』는 표정이다.『야, 너 혼자 공부하니. 수업방해되게.』 다른 학생이 질문하려는 학생의 말을 가로채 힐책하자 진작 질문하러 했던 학생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수업이 끝난 뒤 Q교사는 질문하려 했던 학생에게 눈길을 한번 보내고는 교실문을 나섰다. Q교사는 그 학생의 질문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 내심 미안했지만 한편으론 교실분위기가 그런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겼다.
같은날 6교시 이 학교 3학년2반 물리수업시간. 문제집을 한창 풀어가던 K교사(37)가 학생들에게 『질문 있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모두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선생님은 왜 쓸데없는「질문」을 꺼내 시간을 낭비합니까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학생들은 질문시간에 사지선다형 문제하나 더 푸는게 낫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마음속으로 반문하는 눈치였다.
문제집과 참고서에 다 나와 있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그것도 학력고사에 나올만한 문제만 찍어주면 되는데 「선생니은 왜 그러십니까』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것을 느꼈다고 K교사는 말했다.
『주고받는 질문으로 사고·창의력을 넓혀야할 수업이 대학입시요령만 익히는 비뚤어진 입시교육 때문에 질문 없는 교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K교사는『81년 대입 예비고사가 학력고사로 바뀌고 고교내신성적 반영률이 30%이상 차지하고부터 「질문 없는 교실」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질문 없는 고교수업은 비단 고3교실뿐만 아니다. 고1·고2에서도 마찬가지.
서울 H고교 2학년3반 2교시 국어시간. 2학기 들어 9단원「고시조」수업을 맡은 교단경력3년의 Y교사(27·여)는 황진이가 이별의 정을 노래한 시조를 읽어 내려갔다.「어저/네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다냐./이시라 하더면 가랴만/제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정을 나도 몰라하노라」
Y교사는 서정적 감정을 넣어 읽다가 학생들의 차가운 반응에 그만 깜짝 놀라 멈췄다.
대입이 코앞에 닥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마당에 우리가 지금 한가롭게 「고시조」나 논하게 되었느냐는 학생들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얼이 담긴 고시조인만큼 뜻있는 수업을 하려했지만 그렇다고 입시지옥의 학생들을 탓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Y교사는『질문이 사라진 병든 교육의 병든 수업을 자책하며 온종일 씁쓰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부산 C고교에서 1학년 영어를 맡고있는 W교사(47)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 며칠전 교과서10과 「A LETTER FROM WASHINGTON」(워싱턴에서 온 편지) 의 전문해석을 마치고 과목 뒤에 있는 연습문제와 문장구조에 관한 설명을 마주 할 때였다.
『질문없나』고 묻자 학생들이 질문은 고사하고 연습문제의 해답은 참고서에 있다며 진도를 재촉하는 사이 수업종료 벨이 울려 『차렷』『경례』의 박제된 인사만 끄덕하고 수업을 끝냈다.
질문을 하고싶어도 내신성적 노이로제로 수업분위기를 깨뜨리거나 수업을 독차지한다는급우들의 따가운 화살 때문에 질문하기가 겁이 난다는 학생들.
예상문제만 골라 집중 공략하라는 마치 군대식 같은 학교측의 대입실적일변도의 지시. 참고서와 과외가 대신해주는데 느슨하게 질문이나 받고 수업을 하다가 대입은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학부모들의 극성. 질문을 받고 명쾌한 풀이를 못할 경우 학생들로부터 『실력없다』는 무시와 불신이 두렵기도 한 교사들.
서울K고3년 P주임교사(52)는『이렇듯 교실교육이 무너지고 있으나 학교측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성적위주만을 독려해 회의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고 했다.
대입내신과 입시과열이 빚어낸 질문없는 교실은 언제까지 학교교육이 「가르침만 있고 배움이 없는」 교육으로 갈지 참담하기만 한 현실이다.<탁경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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