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북한에 모욕만 당한 청와대, 대북 전략 전면 재검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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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청와대가 또다시 북한에 의해 공개 망신을 당했다. 지난 주말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의 담화에는 “설레발” “호들갑” “주제 넘은 일” “멍청한 생각” “바보 신세” 등의 비아냥뿐 아니라 “남조선 당국이 숨 가쁘게 흥분에 겨워 온몸을 떨며 대긴급통지문으로 알려온”과 같은 낯 뜨거운 표현까지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생일 축하 메시지 전달 부탁을 받은 게 대단한 성과라도 되는 양 북한과의 대화 재개에 몸이 단 상황을 이렇게 비꼰 것이다. 성인군자가 아니라면 참기 힘든 모욕적 표현이다.

어설픈 중재로 망신 자초 안보실장 #북한 담화, 우리 중재 역할 정면 거부 #바뀐 북 전략 맞춰 대북 정책 수정을

청와대 안보실장에 대한 모욕은 곧 대통령에 대한 모욕이며, 이는 한국민 전체에 대한 모욕이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국민이 모욕을 당하는데도 언제까지 청와대는 남의 일 보듯 ‘무한 관용’으로 일관할 것인가.

북한이 막말을 퍼부으며 청와대를 조롱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해 북한은 평화경제 구상을 밝힌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일”이라고 모욕했고, “겁먹은 개가 짖어대는 것과 같다”거나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두 달 전에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초청하는 친서를 보낸 사실을 폭로하며 망신을 주었다. 북한이 이런 일을 반복하는 것은 그때마다 청와대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침묵한 결과다.

김계관의 담화는 막말보다 그 내용이 더욱 심각하다. 정부가 자처해 온 중재자 역할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조미(북·미) 수뇌들 사이에 특별한 연락 통로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는 북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는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친서가 오간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북한과 미국 양측으로부터 패싱을 당하고 있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당사자인 정의용 안보실장이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김계관의 담화는 한국 정부의 중재자 역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 관계에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주제 넘은 일”이라며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고 했다. 이뿐 아니라 미국과의 대화조차 거부 의사를 밝혔다. “다시는 미국에 속아 시간을 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우리의 길을 갈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연말 소집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결정된 ‘핵무장 완성’으로의 노선 전환 방침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지금의 김정은과 2018년 초 평화 공세로 전환해 나왔던 김정은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청와대는 북한과의 대화에만 집착하는 외교안보 전략의 전면적인 궤도 수정에 나서야 한다. 중재자론·촉진자론에 대한 전면 재검토도 해야 한다. 상대방의 전략이 바뀌었는데도 우리만 과거 전략을 고집해선 안 된다. 남북관계 개선에만 올인하는 사이 한·미 간의 신뢰가 금이 가고 한·일 관계가 훼손된 것도 속히 복원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 내일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를 견인해 낼 수 있는 대북 정책의 전환을 포함, 외교안보 전략 전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들리는 ‘평화경제’와 ‘김정은 답방’에만 매달려서는 이 난관을 헤쳐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