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배명복칼럼

미리 쓰는 21세기 한반도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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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라예보의 총성이 격변의 20세기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면 21세기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총성은 2006년 7월 22일 중국 선양(瀋陽)에서 울렸다. 중국 정부는 선양 주재 미국 영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구하던 탈북자들을 난민으로 인정, 미국행을 허용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김정일 체제 붕괴 과정의 개시와 함께 한반도 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6년 7월은 한반도 역사의 분수령이 된 중요한 시기였다. 냉전 이후 한반도 질서를 지탱해온 두 축이었던 한.미 동맹과 조.중 동맹이 동반 균열 조짐을 보이면서 한반도는 급속히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와 군사대국화 행보는 민족주의의 부활을 재촉함으로써 동북아에 새로운 대립축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라크에 발이 묶인 미국은 군사적 부담을 피하면서 동북아의 불안정한 상태를 타개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은 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 연대하는 전략을 택했다. 미묘한 시기에 북한이 강행한 미사일 시험발사는 한반도 정세 변화의 주주(株主)로서 중국이 미국과 같은 배에 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중 연대는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시사하는 여러 신호들로 나타났다.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카오 소재 중국계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한 데 이어 국유 상업은행인 중국은행(BOC) 마카오 지점의 북한 계좌도 동결했다. 중국은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서 미.러 정상이 공동발의한 세계핵테러방지구상(GICNT)을 지지하고 나섰다. 핵을 무기로 한 김정일 체제의 생존전략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포스트 김정일 체제에 대한 논의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로버트 졸릭 미 국무부 부장관은 2005년 8월 고위급 회담이란 형식으로 만나 김정일 체제 이후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상원 군사외교위 청문회에서 "미국은 북한의 정치적 변화에 따른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것은 그 같은 논의의 결과였다. 미국은 김정일 체제 이후 북한에 친중(親中)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북한이 여전히 미.중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더라도 이를 용인할 의사가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인정은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촉진한 결정적 동인(動因)이었다. 그전까지 중국은 외국공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구하는 탈북자들을 불법 월경자로 간주, 제3국을 경유해 망명 요청지로 보내는 편법을 써왔다. 그러나 선양 주재 미 영사관에 들어간 3명에 대해 국제법상 난민 지위를 인정하고, 사실상의 미국 직행을 허용함으로써 이중생활에 시달리던 북한주민에게 체제 이탈의 물꼬를 터줬다. 작은 구멍 하나가 큰 둑을 무너뜨리듯 선군(先軍)의 기치 아래 강고해 보였던 김정일 체제는 안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이후, 탈북자들의 엑소더스가 본격화하면서 북한 체제는 서서히 붕괴 국면에 접어들었다.

중대한 고비에서 남북한 지도자들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작은 신호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실책을 범했다.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김정일 체제 자신을 겨냥한 꼴이 됐다. 남한 정부도 '자주(自主)'를 앞세운 감상적 민족주의에 빠져 정세 판단을 잘못함으로써 주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대국(大局)을 보는 시야와 전략적 비전이 지도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21세기 한반도 역사는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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