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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영새부 <靈璽簿>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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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에는 망자(亡者)의 위패가 없다. 유골은 물론이다. 대신 영새부(靈璽簿) 1000여 개가 안치돼 있다. 이름.본적 등을 기록한 명부다. 보관 장소는 본전 뒤편 봉안전. 영새부에 오른 망자는 246만여 명이다(2004년 현재). 야스쿠니가 이런 규모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영새부를 통한 합사(合祀) 때문이다.

합사 대상자는 메이지(明治)유신 이래의 전몰자, 공무로 숨진 사람. 제2차 세계대전 때 숨진 군인.군속이 대부분이다.

한반도.대만 출신도 각각 2만여 명이 들어 있다. 전사 당시 일본 국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합사 기준은 엄격하다. 메이지 유신 3걸(傑)중 한 명으로 정한론(征韓論)을 편 사이고(西鄕)는 빠졌다. 나중에 반란(서남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때 발틱함대를 깬 도고(東鄕) 제독도 명부에 없다. 전사하지 않아서다.

합사자는 신(神) 취급을 받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우다. 세는 단위도 명(名)이 아니다. 주(柱)다. 야스쿠니는 전사자 현창(顯彰)을 통해 국민을 전쟁으로 동원했다. 예컨대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원. 하나같이 야스쿠니 부적을 갖고 "죽으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맹세했다고 한다. 야스쿠니는 전전(戰前) 국가주의, 군국주의의 몸통인 셈. 감정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야스쿠니 문제'). 전사의 아픔과 슬픔을 기쁨으로-. 합사제는 유족의 감정을 180도 바꾸는 의식이다.

한번 합사하면 분사(分祀)가 안 된다는 것이 야스쿠니 측 주장. "신사에는 '자리(座)'라는 게 있다. 신이 앉는 방석이다. 야스쿠니는 다른 신사와 달리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 200여만 영령이 하나의 방석에 앉아 있다. 그것을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86년 나카소네 내각 측에서 78년 합사한 A급 전범(戰犯) 14명의 분사 가능성을 타진한 데 대한 마쓰다이라 궁사(宮司.제사 책임자)의 답변이다.

히로히토(쇼와) 일왕이 야스쿠니의 A급 전범 합사에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메모가 지난주 공개됐다. "그래서 그(합사) 이래 나는 참배하지 않는다." 일본에선 천금 같은 얘기다.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의 참배 반대 의견이 60%로 찬성의 세 배나 됐다(아사히). 이 메모가 한.일, 일.중 간 마찰을 부른 '야스쿠니 문제'를 풀 계기가 되는 분위기다. 그것이 총리의 참배 중지나 A급 전범 분사든, 제3의 추도시설 건립이든. 야스쿠니 문제 해결 없이 일본의 아시아 외교는 없다.

정치부문 오영환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