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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홍콩 톱스타 린다이 “당신을 사랑한다, 결혼하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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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신영균이 중국 톱스타 린다이와 함께한 영화 ‘비련의 왕비 달기’. 고대 중국을 소재로 한 사극이다. 신영균의 호탕한 면모를 드러내며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캡처]

신영균이 중국 톱스타 린다이와 함께한 영화 ‘비련의 왕비 달기’. 고대 중국을 소재로 한 사극이다. 신영균의 호탕한 면모를 드러내며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 캡처]

예나 지금이나 배우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스캔들이다. 내 나름으로 주변 관리를 철저하게 해왔지만 피할 수 없는, 60년 영화인생의 유일한 스캔들이 있었다. 홍콩의 유명 여배우 린다이(林黛)와의 염문설이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44) #<15> 영화 인생의 유일한 스캔들 #한국·홍콩 합작영화 ‘달기’서 만나 #가정이 있는 상태라 정중히 거절 #얼마 뒤에 린다이 숨진 소식 들어

1964년 3월, 나는 ‘빨간 마후라’의 엔딩 장면(적탄에 맞아 죽는 장면)을 찍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갔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영화인 ‘비련의 왕비 달기’ 촬영차 홍콩으로 날아갔다. 나는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 역을, 린다이는 주왕의 애첩 달기 역을 맡았다. 달기는 희발(남궁원)을 사랑하면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주왕의 후비가 되고, 감언이설로 주왕을 더욱 포악하게 만든다는 캐릭터였다.

우리는 70일간 촬영하면서 동료 배우로서 가까워졌다. 린다이는 당시 톱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남편 문제였다. 한 주먹 하는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힘들어하더니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홍콩과 한국 언론에서 그녀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급기야 나와 관련이 있다는 기사까지 터졌다. 나를 사모해서 사랑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하자 삶을 비관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꼭 오겠다” 했는데 마음 무거워

영화에 함께 출연한 남궁원. [영화 캡처]

영화에 함께 출연한 남궁원. [영화 캡처]

당시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고인에게 누가 될까 봐 아무런 해명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이랬다. 한창 영화를 찍던 중에 린다이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상대방 언어는 몰랐지만 영어와 보디 랭귀지를 섞어서 소통하곤 했다.

▶린다이=“저는 정말 사랑에 빠져버렸어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이봐 린다이,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야. 와이프가 있어.”

▶린다이=“무슨 상관이에요. 홍콩에선 관계없어요. 그분은 한국 와이프이고 여기서는 제가 당신 와이프를 하면 되잖아요.”

영화 촬영 내내 아내는 홍콩에서 내 스케줄 관리 등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가정불화를 겪던 린다이로서는 다정한 우리 부부가 적잖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만큼이나 린다이와 가깝게 지낸 아내는 이런 해프닝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내가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린다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래요, 잘 대접할 테니 언제든 오세요.”

이런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고 비통했지만 나는 린다이의 장례식조차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만난 그의 동료 배우 리리화(李麗華)는 “린다이가 당신을 얼마나 생각했는데 장례식조차 안 왔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나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죽음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 상황이었기에, 섣부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혹여 내 아내가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됐고, 그녀의 남편을 비롯한 유가족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말 나 때문에 가정불화가 심해진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저세상에서 그녀를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홍콩영화 제작시스템에 한 수 배우기도

한국·홍콩이 합작한 영화 ‘달기’ 포스터.

한국·홍콩이 합작한 영화 ‘달기’ 포스터.

‘비련의 왕비 달기’는 한국영화사에서 성공적인 합작 영화 모델로 평가받는다.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과 런런쇼(邵仁楞) 대표의 쇼브라더스는 한국과 홍콩을 이끌어가는 영화사였다. 두 영화사가 만난 것만으로도 한껏 기대를 모았다. 연출은 최인현 감독과 홍콩의 악풍(岳楓) 감독이 맡았다.

아시아 21개국에 동시 개봉된 이 영화는 화려한 궁중 세트 등 볼거리를 제공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로선 상상하기 힘든 대규모 예산이 투입됐는데 영화에 동원된 말이 3500필, 엑스트라는 무려 10만5000명에 달했다.

나는 이 영화로 제4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국제극장에서 개봉돼 인기를 끌었는데 DVD는 홍콩 개봉 버전으로만 출시돼 못내 아쉬웠다. 2년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국내 개봉 버전을 4K 화질로 복원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1960년대 홍콩에서 한국영화의 인기는 대단했다. 남궁원·이예춘씨와 홍콩공항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홍콩 시민들은 “왕배우가 왔다”며 환호를 보냈다. 영화 일정을 마친 후엔 런런쇼 대표가 배우들을 초청해 극진한 음식을 대접했는데 일평생 그렇게 맛있는 중국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당시 홍콩은 이미 컬러영화 시대를 누리고 있었고 영화배우의 위상도 우리와 달랐다. 홍콩 배우들은 1년에 세 편 정도 출연하면서도 대저택에 살고 고급 승용차를 몰며 풍요한 생활을 누렸다. 반면 우리는 1년에 20편 이상 겹치기 출연하고도 받는 돈은 홍콩 배우의 절반 수준이었다. 홍콩에서는 아무리 촬영 스케줄이 많아도 오후 7시 30분 이후로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았다. 밤샘 촬영을 밥 먹듯 하는 우리로서는 꿈같은 생활이었다.

하지만 나는 머지않아 우리 영화가 홍콩을 압도하고 해외에 명성을 떨치리라 확신했다. 더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감독·배우를 포함한 영화인들의 열정과 실력은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반백 년이 지난 지금,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도록 해 준 많은 영화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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