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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국민 눈물 쏙 뺀 ‘미워도 다시 한번’…천사 같은 아내역, 전계현 떠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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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960년대 한국 멜로 영화의 한 획을 그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전계현·신영균·문희(왼쪽부터)의 삼각 관계를 다뤘다. [중앙포토]

1960년대 한국 멜로 영화의 한 획을 그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전계현·신영균·문희(왼쪽부터)의 삼각 관계를 다뤘다. [중앙포토]

“선생님, 전계현 선배님이 돌아가셨대요.”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40) #<11> 20일 별세한 50년 동료 #을지로 3가~4가까지 관객 늘어서 #현재 기준으론 최소 1000만 작품 #‘아폴로 박사’ 조경철과 결혼식 생생 #2주 전에도 나랑 같이 식사했는데…

지난 21일, 토요일 오후 배우 문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누구라고, 누구”라고 묻자 문희가 “‘미워도 다시 한번’의 본마누라 말이에요”라고 답했다. 믿기지 않았다. 청천벽력 같았다. 2주일 전쯤에도 점심을 함께한 전씨 아닌가. 전씨는 그때 꽤 건강해 보였다. 생애 처음으로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말이 실감 났다. 2주 전 식사 자리엔 내 아내도 동석했다. 아내가 “80대 초반인데 어쩜 그리 주름 하나 없어 보인다”고 궁금해하자 전씨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체중이 그대로다. 더 찌지도, 빠지지도 않았다. 매일 열심히 운동한 덕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22일 서울성모병원에 문상을 갔다. 지난 50여년간 배우로, 생활인으로 동반자 비슷하게 지내온 전씨인지라 그를 떠나 보낸 빈 구석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엔 문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영정 속의 전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는 듯했다. “1971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전 선배님이 조경철 박사님과 결혼할 때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문희) 나도 ‘미워도 다시 한번’을 찍던 기억이 새로웠다. “문희씨,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정답게 지내온 지난 시간이 고마울 뿐입니다.”

전씨와 조경철 박사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였다. 당시 조 박사도 ‘아폴로 박사’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정상급 배우와 스타 과학자의 만남, 영화 속 같은 커플이라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다. 신문 1면에 나올 정도였다. 그들이 부부의 연을 맺은 계기도 영화다. 바로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 68년 해외 유치 과학자 1호로 귀국한 조 박사는 우연히 이 영화를 본 뒤에 전씨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영화 속 남편인 내가 몰래 사귄 젊은 여인(문희)이 8년 만에 데려온 어린 아들(김정훈)을 받아들이는 전씨의 인내하는 여인상에 반해 “저런 천사 같은 여자가 있을까”라며 구애했다고 한다. 전씨는 생전에 “조 박사가 당시 구하기 힘든 커피 프림을 안겨주고, 영화 ‘잊혀진 여인’ 포스터에 나온 내 모습을 유화로 그려 선물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1971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배우 전계현과 조경철 박사의 결혼식 모습. [중앙포토]

1971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배우 전계현과 조경철 박사의 결혼식 모습. [중앙포토]

‘미워도 다시 한번’은 내게나 전씨에게나 분수령이 된 작품이다. 머슴·왕 등 강인한 남성상을 주로 소화해온 내가 본격 멜로물에 처음 도전한 영화다. 정숙하면서도 생활력 강한 아내와 귀엽고도 청순한 연인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우유부단한 가장을 맡았다. 나보다 2년 먼저 충무로에 입성한 전씨 또한 이 영화로 중량급 조연에서 톱스타로 우뚝 서게 됐다. 나 또한 ‘빨간 마후라’ 다음으로 꼽는 인생작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서울 국도극장 한 곳에서 37만 관객을 끌어들였다. 68년 서울 인구가 갓 400만을 넘었으니 서울 사람 10명 중 한 명이 본 셈이다. 재개봉관·재재개봉관, 지방까지 합하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요즘으로 치면 최소 1000만은 넘을 것 같다.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고’로 시작하는 주제가도 남진·이미자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했다. 또 69년, 70년, 71년 속편이 잇따르며 총 네 편의 시리즈로 완성됐다. 2편, 3편, 4편도 각각 관객 25만 명, 20만 명, 15만 명을 기록했다. 흥행을 노린 최루물이란 시선도 있지만 60년대 도시화 물결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네 가정과 남녀 관계를 조명한 의미마저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그간 전씨와 자주 만나며 옛 추억을 되살렸다. 내가 “개봉 당시 표를 사려는 인파가 을지로 4가 국도극장에서 을지로 3가 네거리를 지나 명보극장까지 이어졌다”고 하면 전씨가 “남자든, 여자든 손수건을 들고 훌쩍거리며 극장 문을 나섰다. 홍콩·대만에서도 인기가 대단해 사인 요청이 밀려들었다”며 즐거워했다.

내 아내도 나와 함께 영화에 나온 여배우 가운데 전씨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크고 작은 일을 상의할 만큼 사이가 도타웠다. 우리 셋이 만날 때면 “내가 본본마누라”라며 분위기를 돋우곤 했다. 전씨가 23일 경기도 파주 통일통산에 있는 남편 묘소 옆에 누웠다. 천문학자인 남편과 함께 영원한 별로 빛날 것으로 믿는다. 천국에서의 사랑과 평화를 기원한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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