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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일천' 첫 무대 뒤 월급 700원…그 시절엔 4인 가족 생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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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배우 이영애(왼쪽)와 김동민. [영화 캡처]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1948)의 배우 이영애(왼쪽)와 김동민. [영화 캡처]

“새 이름으로 ‘신일천(申一天)’이 어떤가. 연기에 뛰어난 소질이 있으니 천하에 네가 제일이라는 뜻을 생각해봤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36) #<7> 한성고 시절 소년가장 배우 #“천하에 최고” 단장이 예명 지어줘 #낮엔 수업 듣고 저녁엔 무대 올라 #순회공연 중 트럭 사고로 죽을 뻔 #안정적 생활 위해 서울대 치대 입학

영화계 데뷔 전까지 나는 ‘신일천’이라는 이름으로 연극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 극단 청춘극장을 만든 김춘광(1901~1949) 단장이 손수 지어준 예명이다. 그는 배우로서의 내 재능과 노력을 처음 인정해준 분이다. 충무로에 들어와서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쓰는 게 효도라 생각해 본명을 쓰게 됐다.

김 단장과 연을 맺은 건 한성고 재학 시절이다. 집 근처에 있는 종로 YMCA 레슬링 도장에 다녔는데 함께 운동하던 친구가 김 단장의 아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레슬링은 취미로 시작했지만 아마추어 대회에서 웰터급으로 2년 연속 우승할 만큼 실력을 쌓았다) 내가 틈만 나면 연기 연습을 하는 걸 보더니 김 단장에게 한번 테스트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김 단장은 나를 ‘대원군’의 주연으로 발탁했다. 낮에는 학교, 밤에는 무대라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리고 그리던 배우가 돼 힘든 줄 몰랐다.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자 월급 700원을 받았다. 당시 1000원이면 4~5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 정도 됐다.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삼 남매를 홀로 키워 온 어머니께 보탬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 이제 대학 안 갈래요. 연극만 하고 살래요.”

“이노무 자식, 너 공부시키려고 이북에서 내려왔는데 딴따라나 하겠다고?”

교육열이 대단했던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말렸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졸업 이후 2년가량 연극에 흠뻑 빠졌다. ‘안중근 의사’ ‘미륵 왕자’ ‘이차돈’ 등 여러 작품의 주연을 맡았다.

인기 변사 출신인 김 단장은 희곡작가로도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그의 대표작 ‘검사와 여선생’(1948)이 사실 나의 숨은 영화 데뷔작이다. (공식적으론 1960년 첫 주연을 맡은 ‘과부’다) 김 단장의 후배인 윤대룡 감독의 데뷔작으로 여선생의 제자가 훗날 검사로 성공해 옛날 선생님의 살인 누명을 벗겨준다는 스토리다. 나는 조연인 변호사로 나왔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슬프고도 감동적인 얘기다.

변호사로 나온 신영균. [영화 캡처]

변호사로 나온 신영균. [영화 캡처]

영화가 흥행하자 윤 감독은 이후 또다시 출연을 제안했다. ‘조국의 어머니’(1949)에서 주연 주증녀씨의 아들 역할을 권했다. 나는 바로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이를 안 김 단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한 번은 눈감아 줬지만 영영 연극계를 떠날 셈이냐. 날 버리고 어딜 가겠다는 것이냐.”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영화는 없는 일로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1949년 6월, 김 단장이 뇌염으로 세상을 떴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연극계에도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도 극단 해체 직전에 나왔다. 오랜 꿈인 배우로 당당히 섰지만 뭔가 가슴 한편을 짓누르는 게 있었다. 무엇보다 생계가 힘들었다. 가까이서 본 연극계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다. 전국 순회공연을 할 때도 기차 탈 돈이 없어서 트럭에 장비와 소품을 잔뜩 싣고 그 위에 배우들이 올라탔다. 기름 한 방울이 귀한 시절, 숯을 태워 달리는 목탄차라는 게 있었다. 목탄차는 엔진이 약해서 걸핏하면 시동이 꺼졌다. 경사 심한 오르막길에서 시동이 꺼지면 배우들이 트럭을 밀고 올라가야 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도 있다. 한번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하는데 한밤중에 트럭이 얼음판에 미끄러지면서 언덕 아래로 굴렀다.

“여기요 여기, 바퀴에 사람이 깔렸어요.”

나는 레슬링을 한 운동신경이 있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아이들이 머리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한집안 가장인 선배 배우들은 식솔들을 데리고 지방 공연을 따라다니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나중에 내 가족도 이런 일을 당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더 기반을 닦은 후에 배우를 다시 해도 늦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치과의사를 하면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연극 대사를 잘 외워 암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해 서울대 치대에 들어갔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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