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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실감나게 찍자"며 실탄 쏴…'빨간 마후라' 죽는 줄 알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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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영화 ‘빨간 마후라’에서 주인공 나관중 소령 역할을 맡은 신영균씨가 북한군 적기의 총탄을 맞고 죽는 장면. 신상옥 감독은 실감나는 연출을 위해 실제 사격수가 실탄을 쏘게 했다. [영화 캡처]

영화 ‘빨간 마후라’에서 주인공 나관중 소령 역할을 맡은 신영균씨가 북한군 적기의 총탄을 맞고 죽는 장면. 신상옥 감독은 실감나는 연출을 위해 실제 사격수가 실탄을 쏘게 했다. [영화 캡처]

한 달 전쯤이다. 제주도에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을 둘러보러 갔는데 한 30대 부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신영균 선생님 아니세요? 저희 어머니가 대단한 팬이셨어요.” 그러고는 함께 온 꼬마 아이에게 나를 소개했다. “저 분이 그 빨간 마후라 할아버지야.” 우리는 다정하게 기념사진을 남겼다. 아흔이 넘은 파파 할아버지가 됐는데도 나를 기억해 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30) #<1> 내 삶을 바꾼 '빨간 마후라' #55년 전엔 특수촬영기법 없어 #감독도 비행기 타고 공중 촬영 #10m뒤서 총쏴 머리 스칠 땐 식은땀 #서울 인구 100만일 때 25만 관객 #명동부터 을지로상가까지 줄 서 #빨간마후라 노래 공군 군가로 채택

300편 넘는 출연작 가운데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인생작을 꼽으라면 단연 ‘빨간 마후라’(1964)다. 배우 신영균은 몰라도 영화 '빨간 마후라'를 아는 젊은이가 많다. 나는 해군 군의관 출신인데,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공군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고인이 된 배우 최은희씨와 6년 전 '빨간 마후라' 촬영지를 다시 찾았던 일이 기억난다. 경기도 수원 제10전투비행단에서 2013년 7월 조종사의 날을 맞아 우리 두 사람을 초청했다. 비행장 사령부 건물에 들어서니 우리의 얼굴이 크게 그려진 '빨간 마후라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원로배우 신영균(91)씨가 지난달 7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된 빨간마후라 동상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김경희 기자

원로배우 신영균(91)씨가 지난달 7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된 빨간마후라 동상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김경희 기자

빨간마후라 때 처음 암표 생겨

영화에서처럼 F-5 전투기 조종석에 앉으니 반백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실제 영화에서 쓴 전투기는 F-86 세이버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내 이름을 말하려다 그만 “49년 만에 돌아온 나관중 소령이다!” 외치고 말았다. 최은희씨도 감격스러워했다. “대한민국이 발전한 것처럼 공군도 못지않게 발전했네요. 마음 든든합니다.”

군악대의 환영 주악과 함께 영화의 주제가가 울려퍼졌다. 영화가 흥행한 이후 '빨간 마후라'는 공군의 상징이 되고, 동명의 주제가는 공군의 대표곡이 됐다. 내가 지금도 외워 부르는 노래는 '빨간 마후라'와 '미워도 다시 한번' 두 곡뿐이다.

신영균씨와 고 최은희씨가 2013년 7월 영화 ‘빨간 마후라’ 촬영지를 찾았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신영균씨와 고 최은희씨가 2013년 7월 영화 ‘빨간 마후라’ 촬영지를 찾았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신영균씨와 고 최은희씨가 2013년 7월 영화 ‘빨간 마후라’ 촬영지를 찾았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신영균씨와 고 최은희씨가 2013년 7월 영화 ‘빨간 마후라’ 촬영지를 찾았다.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르고, 구름 따라 흐른다 나도 흐른다. 아가씨야 내 마음 믿지 말아라, 번개처럼 지나갈 청춘이란다.”

내게 노래를 가르쳐 준 사람은 가수 현미씨였다. 1968년에 LP 음반을 내기도 했다. 89년에는 ‘쟈니윤 쇼’에 출연해 최은희·최무룡씨와 함께 합창을 했다. 요즘에도 종종 마이크를 잡곤 한다. 배우 시절, 하도 큰소리를 내서인지 기관지가 약해진 탓에 예전처럼 힘있게 부르지 못하지만 말이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문 60년대 초·중반은 전쟁영화 전성기였다. '빨간 마후라'는 52년 평양에서 10㎞ 떨어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투입됐던 실존 인물과 스토리를 실감나게 다뤘다. 나는 별명이 ‘산돼지’였던 유치곤 장군(1965년 작고)을 모델로 한 나관중 소령 역을 맡았다.

편대장 조종사인 나관중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전투에서 죽기 전 부하들에게 남긴 명대사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죽는 건 몰라도 너희들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전쟁이 휩쓴 잿더미 위에서 이 나관중이는 거름이 되면 그만이다."

신영균 주연의 영화 '빨간 마후라'(1964) 스틸컷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신영균 주연의 영화 '빨간 마후라'(1964) 스틸컷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대만서도 관객 몰려 경찰 기마대 동원

하지만 나관중은 사랑 앞에선 서툴렀다. 최은희는 전사한 조종사 노도순(남궁원)의 부인 지선 역이었다. 노도순이 각별한 동료였기에, 나관중은 지선을 마음에 품고도 양보했다. 노도순이 숨진 후에는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후배 조종사 배대봉(최무룡)을 연결해 주었다. 이를 답답히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 나름대로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6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 '빨간 마후라'의 인기는 대단했다. 명동 매표소부터 늘어선 관객 줄이 을지로 상가까지 이어졌다. 그때부터 암표라는 것이 생길 정도였다. 관객 수 25만 명으로 그해 흥행 1위작이 됐다. 당시 서울 인구(100만 명)의 4분의 1이 본 셈이라고 한다.

영화 '빨간 마후라'(1964) 스틸컷. 왼쪽부터 최은희, 신영균, 최무룡, 윤인자.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영화 '빨간 마후라'(1964) 스틸컷. 왼쪽부터 최은희, 신영균, 최무룡, 윤인자.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요즘에도 종종 '빨간 마후라'를 보곤 하는데, 그 시절에 이렇게 실감나는 공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새삼 놀랍다. 신상옥 감독과 배우들의 열정, 공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 감독은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기에 올라타 공중 촬영을 했다. 감독이 목숨을 거는데 배우라고 몸을 사릴 수 없었다. 전투기에서 적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장면을 찍을 때 정말 실탄을 썼다고 하면 믿을까. 지금처럼 특수촬영기법이란 게 없던 시절이었다.

“신영균씨, 우리 실감나게 한번 찍어 보자. 카메라에 나오면 안 되니까 한 10m 뒤에서 총을 쏠 거야.”

“실탄을 쏜다고요?”

“일등 사격수를 데려왔으니 걱정 마시게.”

신 감독은 내게 연기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촬영장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아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기도만 했다고 한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촬영이 끝났다. 총알이 내 머리를 스쳐 조종석 앞유리를 뚫고 지나가는 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원로배우 신영균(91)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91번째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준비한 빨간마후라 포스터와 인형 앞에서 부인 김선희 여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경희 기자

원로배우 신영균(91)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91번째 생일을 맞아 가족들이 준비한 빨간마후라 포스터와 인형 앞에서 부인 김선희 여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경희 기자

'빨간 마후라'는 대만·홍콩 등에도 수출되면서 한국 영화의 무대를 넓혔다. 대만에서는 인파가 몰려 경찰 기마대가 동원되기도 했다. 이 영화로 신 감독은 제11회 아시아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나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최고의 사람이 바로 신 감독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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