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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경서의 퍼스펙티브

빈부격차가 계급문제라면 미세먼지는 ‘민주적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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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배고프다”보다 “불안하다”가 압도하는 위험사회

2021년 ‘파리 기후 협정’ 시행을 앞두고 지난 9월 23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2019 유엔 기후 행동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21일 한국의 환경 운동가들이 기후 위기를 막을 행동을 촉구하며 서울의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고 있다. [AP]

2021년 ‘파리 기후 협정’ 시행을 앞두고 지난 9월 23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2019 유엔 기후 행동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21일 한국의 환경 운동가들이 기후 위기를 막을 행동을 촉구하며 서울의 길바닥에 누워 시위하고 있다. [AP]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2015)은 역저 『위험 사회』(1986)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화가 ‘위험사회(Risk society)’를 낳는다고 경고함으로써 위험을 현대사회를 읽는 키워드로 만들었다. 위험이라는 개념이 근대 산업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극복이나 회피라는 개념으로 통용되기에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그는 진단한다.

기후변화 위험 너무 쉽게 간과해 #상상 속의 비극이 일상이 될 우려 #툰베리 외침, 우리의 책무 일깨워 #개인·국가·지구 차원서 대응해야

특히 오늘날 인간에 의해 생산되는 기후변화 같은 위험은 어느 특정 국가, 특정 민족이 극복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무릅쓸 수 없는’ 범지구적 재앙 차원이 됐다. “나는 배고프다. 빵을 달라”라는 외침 대신 이제는 “나는 불안하다”는 심리 기제가 우리 의식에 더 깊숙이 자리 잡게 됐다.

벡은 ‘성찰적 근대화’ 담론을 통해 이러한 위험사회의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처방을 제시했다. 그는 성찰적 근대화 시대에서 권력 질서가 다양한 ‘하위정치(Subordinate Politics)’로 대체될 것을 예측하면서 하위정치 영역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예컨대 하위정치란 위험사회를 도래케 한 과학의 정당성을 전문가에게만 맡기지 말고 비전문가들로 구성된 일반인들이 참여해 비판적인 공론의 장을 형성해 의사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위험 사회』가 발표된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위험사회론’을 제시하는 벡의 통찰과 혜안은 오늘날 훨씬 더 강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퇴보하지 않는 이상 위험사회는 더 확대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는 벡의 말을 요즘 식으로 바꾸면 “빈부 격차는 정치·계급적이지만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는 민주적”이라고 바꿔도 될 것이다. 그만큼 기후 위기는 위험사회에서 범지구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고 치열한 토론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주제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1902~1994)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미래라면 더는 미래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지 않는 한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는 암울하게 닥쳐올 디스토피아(Dystopia)임이 틀림없다.

지난 11월 5일 전 세계 150여 개국에서 1만여 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기후 비상사태 경고’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 기후위기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의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지구의 미래는 거주가 가능한 ‘외쿠메네(Ökumene)’의 공간을 상실하고 거주할 수 없는 공간인 ‘아뇌쿠메네’가 될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런데도 기후위기라는 리스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더디고 무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기후변화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거의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위기의 실체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아 간과하기 쉽다.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런 위험을  해결하려는 실천력이 부재한 현상을 ‘기든스의 역설’(Giddens's paradox)이라 부른다.

어떻게 하면 기든스의 역설을 풀 수 있을까. 개인적 실천으로는 ‘BMW’라는 게 있다. 승용차 대신 버스(Bus)와 지하철(Metro)을 이용하고, 더 많이 걷는(Walking) 것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더운물 목욕을 덜 하고, 일회용 플라스틱 용품을 적게 사용하려는 노력도 작지만 중요한 실천이다. 하지만 기든스의 역설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기후변화의 문제는 추상성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개개인이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내일의 큰 이익을 포기하고 오늘의 작은 이익과 보상을 위해 살아가기 바쁜 존재들이다. 결국에는 세계 또는 국가 차원의 정치적·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정책이 요구된다.

기후변화는 범지구적인 문제이지만, 선진 산업 국가들은 18세기 중엽에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 자신들이 하늘로 쏘아 올려 누적된 대기 중 오염물질에 대해서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이들 국가는 산업화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도 오늘날 모든 국가가 똑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발상은 신자유주의적인 국가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은 1899년에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유명한 구절을 만들었다. 그는 피식민 국가의 유색인종 계몽과 문명화를 백인들이 떠맡아야 할 책무로 둔갑시켜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산업화가 야기한 지구온난화로 피해를 보게 되는 국가들에 대해서 진정한 ‘백인의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남태평양의 평화로운 작은 섬나라 투발루가 해수면 상승으로 2050년쯤 물에 잠겨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북반구의 산업 선진국들이 뱉어내는 온실가스 때문에 수천㎞ 떨어진 공장 하나 없는 애꿎은 섬나라가 사라질 기로에 놓여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위험사회를 인식하고 그 실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2017년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그 권고안을 받아들인 것도 하위정치 사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위험사회를 보는 그의 관점은 원자력 발전이 가져다줄지 모르는 재앙에 지나치게 방점이 찍혀 있다.

탈원전 정책은 위험사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관점에서는 타당한 듯 보일 수도 있지만, 문 대통령은 원전의 안전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어느 원전 전문가에 따르면 원전에서 중대 사고가 날 확률은 100만분의 1에 불과하다. 지난해 빌 게이츠도 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막는 유일한 길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이 이상적이며, 원자로의 사고 위험은 혁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정부 들어 에너지 정책의 근간은 원자력 발전을 태양광 발전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일견 기후위기 대응 의지를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발전 업계에 따르면 원전 1기의 발전 용량(1GW)과 맞먹는 태양광 발전소를 지으려면 서울 여의도 면적(2.9㎢)의 4.6배나 되는 13.2㎢(축구장 2000개 면적) 땅 위에 태양광을 모으는 시커먼 모듈(집열판)을 설치해야 한다. 원전을 대체해 태양광 발전을 하겠다는 발상은 이산화탄소를 빨아 먹는 애써 가꾼 산림을 파괴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 설비를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태양광 발전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데도 오히려 화석연료 발전이 더 늘어나는 추세다. 이는 곧 기후변화와 직결된다.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은 필연적이지만 기술 혁신 수준을 놓고 볼 때 화석연료 의존에서 완전히 탈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에너지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궁극적으로는 탈원전이 바람직하지만, 지금은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하는 절박한 위기 상황이다. 따라서 기술 혁신을 통한 재생에너지 발전에 대한 경제성이 획기적으로 발전될 때까지 탄소 배출이 없는 원전을 통해 엄청난 양의 전기 소비에 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나아가 온실 효과로 인한 각종 생태계 파괴, 해수면 상승과 같은 비극적인 참사를 막아야 한다. 우리는 화석연료가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향유한 세대인 동시에 화석연료의 치명적 악영향인 기후위기를 인식한 첫 세대다. 또 그런 재앙에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엄중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레타 툰베리

그레타 툰베리

스웨덴의 열여섯 살 소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지난 9월 23일 ‘2019 유엔 기후 행동 정상회의’에서 “여러분들은 공기 중에 배출해 놓은 수천억t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의무를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떠넘기고 있다”며 열변을 토했다. 그 연설은 기후위기 대응에 대한 ‘우리 세대의 책무’를 일깨우는 외침이었다.

미국 생태 문학의 대모 레이철 카슨(1907~1964)은 봄이 되었건만 새들이 자취를 감추고 들판과 숲에 오직 정적만이 감도는 ‘침묵의 봄’의 도래를 우려했다. 그는 “(기후변화라는)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고 했다. 그의 절실한 경고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유효한 순간 아니겠나.

키워드

위험사회
울리히 벡이 처음 사용한 개념. 예전에는 위험이란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이라는 함의가 있었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위험은 보편성을 띠고 범지구적으로 현대사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위정치
기술·경제 권력의 독점화 구조를 해체하고 중요한 사회적 결정에 일반인이 참여해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자는 정치형태. 위험사회를 도래케 한 과학의 정당성을 전문가에만 맡기지 말고 시민이 직접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생활정치다.

그레타 툰베리
기후변화 대책을 촉구하며 2018년 스웨덴 의회 밖에서 ‘청소년 기후 행동’을 시작한 소녀 환경운동가. 세계적인 기후 관련 동맹휴학 운동을 이끌고 ‘2019 유엔 기후 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했다. 시사주간 타임이 선정한 ‘2019년 올해의 인물’.

박경서 문학평론가·번역가·영문학자(영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