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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국민연금, 상장사 302곳 경영간섭 가능…연금 상전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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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민연금이 기업의 이사 해임이나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주주활동 지침’을 의결하면서 재계에선 ‘연금 상전 시대’가 열렸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장 내년 3월 주총시즌 때부터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더 깊숙이 간섭하는 길을 텄다는 점에서다.

주주권 행사 지침 논란 #‘큰손’ 연금, 주총 안건 영향력 세 #‘우려 사안’ ‘적정 배당’ 기준 모호 #기금위 정부 인사 6명, 독립성 우려 #“연금사회주의 논란 더 커질 것”

우려가 큰 배경은 국민연금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한국 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특수성 때문이다. 29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금융자산 700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올해 10월 기준으로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는 302개사,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99개사에 이른다. ‘대한민국 경제의 지주회사’라 불리는 이유다.

상장사 영향력 큰 국민연금.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상장사 영향력 큰 국민연금.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큰손’인 국민연금이 주총 안건을 건의하면 기관투자가나 소액 주주들이 가세하면서 통과될 가능성이 커진다. 지난 3월 국민연금의 반대로 조양호 당시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은 바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국민연금은 자기 돈이 아닌 ‘국민의 돈’이라는 점에서 주주라고하기 어렵다”며 “국민연금 고갈에 대한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짚었다.

문제는 국민연금은 정치적 압박에 쉽게 휘둘리는 구조란 점이다. 주주권 행사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기금운용위원회’는 독립성·전문성이 중요한데,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고 있다. 20명 위원 중 대통령이 임명하는 인사가 6명이다. 외부 전문가 2명을 뺀 나머지는 노동자·지역가입자 대표 등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공적연금이 주식의결권을 가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7개국 가운데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이 공적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 수장을 맡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국민연금이 기업 지배구조를 문제 삼지만, 국민연금 지배구조가 더 문제인 셈이다.

국민연금 주요기업 지분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민연금 주요기업 지분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독립성이 취약한 기금위 구조를 감안할 때 앞으로 정부는 물론 노동계와 시민단체도 국민연금에 영향력을 행사, 기업 경영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주주권행사에 대해 연구해 온 곽관훈 선문대 교수도 “정부 인사, 비전문가 위주인 기금위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잣대로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이 타격을 입고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주주권 행사 조건이 불명확한 점도 기업의 불안을 키운다. 가이드라인에서 규정한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 ‘적정한 배당 정책’ 등이 무엇인지 구체적 않다는 것이다. 특히 법원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이 남아있는데도, 의혹만으로도 주주권 행사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 논란이다. 예컨대 노조 와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 대해 해임을 건의하거나, 이사선임에 반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등기이사 재선임을 포기한 이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상해온 ‘이사회 중심 경영’에 타격이 생긴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10대 대기업 임원은 “기업의 횡령·배임은 변수가 많아 사법부에서 신중히 판단을 받는 건데, 이제 사회적 물의만 빚어도 표적이 되게 생겼다”며 “노후자금 증식이 목적인 국민연금이 공정위·금감원·국세청과 같은 규제기관이 됐다”라고 말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정부가 국민연금을 이용해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연금사회주의’ 논란이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손해용 경제에디터, 이소아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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