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참뜻은 화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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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이 시기에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교황이 오고 세계 1백여 개국으로부터 1만여 명의 가톨릭 지도자와 신도들이 모이며 모처럼 북한으로부터도 신도들이 참가할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외형적 행사 속에 담겨져 있는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겨레 모두에 절실한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행사는 가톨릭교도들의 축제라는 한정된 의의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우리사회 전체가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 보편성을 우리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에서 찾을 수 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그리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그는 기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 내부와 남북관계에 있어서 지금 유례를 찾기 힘든 미움과 다툼과 분열을 겪어오고 있다. 이와 같은 불화를 사랑과 용서와 화합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가 남긴 지고한 기도를 말만이 아닌 온몸과 정신으로 체득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일상적인 관심이나 노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이번 성체대회가 신앙의 차이를 넘어 그와 같은 정신적 도약을 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인간을 세속적 관심과 자기중심의 굴레에서 한 단계 높여 박애와 관용의 차원으로 올라서게 하는 옛 성현의 가르침과 진리는 시대 상황이 바뀔 때마다 당대의 사람들이 새로 그 참뜻을 발견하고 행동화하지 않으면 한낱 허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 평화의 참뜻은 절실한 의미를 갖기 어려우며 절망의 나락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희망의 감격을 느끼게 하기 어렵다.
격렬한 갈등과 변혁의 과정을 겪고 있는 우리 세대에 평화와 사랑의 참뜻을 깨닫게 하는 일은 직접 그러한 극한적 상황을 겪지 않고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관용에 눈뜨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해방신학의 큰 별인 헬데르 카마라 대주교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란 단순히 폭력과 살해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와 공동선을 핵심으로 한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를 함께 뜻하는 것이다. 같은 핏줄과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지금처럼 불신과 분열, 대결과 미움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남북관계와 지역·계층·세대간의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는 이런 평화의 참 뜻을 가슴깊이 되새겨야 할 때다.
그리고 21세기로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로서는 이제 한반도라는 좁은 땅 안에서의 갈등에만 집착하지 말고 인류 전체의 문제에도 관심을 돌려야 할 단계에 와있다.
인류의 먼 장래를 위협하는 지구환경에 대한 위협과 핵무기·군비경쟁의 공포, 그리고 제3세계에서 아직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절대 빈곤의 문제도 삶의 영역이 전 지구로 확대되고 있는 오늘에는 결코 남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번 모임이 우리 사회의정신세계에 새로운 각성을 가져오고 보다 큰 관용으로 참 평화를 이 나라에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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