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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바람을 부르는 바람개비 46. 베트남 한센환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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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자(左)와 빈딘성의 잔왕 부주석이 직업훈련원 건립비를 제막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과거에는 불치의 병으로 분류됐던 한센병(hansen disease). 나균에 의해 피부.신경.눈.뼈 등이 파괴돼 신체 기형을 가져오는 전염성이 강한 무서운 병이다. 지금은 신약 개발로 완치가 가능하다.

예전에는 '문둥병' 또는 '나병''천형병(天刑病)'으로 불렸고, 이 병에 걸리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소록도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치료를 받고 재기를 위해 노력하던 장소였다. 1993년 초 지금은 고인이 된 박선규 한센복지협회장이 나에게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의 도움으로 한센병을 극복해 냈는데, 이젠 우리가 후진국을 도와야 할 때"라고 넌즈시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는 이들을 위한 후원회를 만들고, 후원회장을 맡아 일을 해 달라고 내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의 어릴 적 기억에도 한센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아버지와 아들이 구걸하러 다니던 측은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해 7월 한센국제협력후원회를 만들고 모금에 들어갔다. 한센복지협회 산하 전국 11개 시.도 지회와 손잡고 거리 캠페인과 자선바자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우루과이라운드협정 체결 때는 '우리 쌀 사주기 운동'을 벌여 수익금을 후원금으로 적립했다. 길병원 직원과 많은 이웃에게도 이 뜻깊은 일에 동참하도록 독려해 1인 1만원의 후원금을 적립케 했다. 98년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후원자의 모금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6억7000만원을 모았다. 이 정도면 외국의 한센병 환우를 도와줄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베트남을 우선 지원대상국으로 정했다.

베트남을 선정한 이유는, 한국군이 참전했던 배트남전 때 전사한 분들과 그 유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91년 당시 박양실 한국여자의사회 회장과 여의사 10여 명으로 구성된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무료 진료 활동을 벌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봉사단은 열흘 동안 무료 진료를 하던 중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던 베트남 여성 도티늉을 찾아낸 바 있다. 나는 그녀를 우리 병원에 데려와 무료로 수술해 줬다. 그래서 베트남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우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부대 주둔지이자 격전지로 알려진 '빈딘성'에 직업훈련원을 지어주기로 했다. 2001년 5월 착공, 그 해 12월 7일 준공식을 했다. 빈딘성 퀴논시에서 1.5㎞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직업훈련원은 실습교실.숙박시설.식당.관리실.수위실 등을 갖추고 있다.

재봉.재단기술 교육을 위한 재봉틀을 비롯한 관련 기기 등을 구입해 주고, 운송수단인 승합차량도 사줬다. 매달 300만원의 운영비 지원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후원회 직원을 1년에 한 번씩 현지로 보내 훈련원의 운영 및 자금 운용실태를 파악하고 추가 지원사항을 파악한다.

지금까지 23기에 걸쳐 554명이 재봉기술을 배워 빈딘성뿐 아니라 베트남 전역 유명 봉재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업훈련원 관계자들로부터 베트남 한센병 환우와 그 가족들이 기술을 익혀 사회에 복귀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흐뭇하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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