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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수첩 아닌 '메모'라는 송병기의 전략…"안종범 판례 본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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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이 23일 오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최근 검찰 수사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이 23일 오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최근 검찰 수사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법률자문을 받은 듯 상당히 전문적인 기자회견이네요."

송병기 "풍문담은 메모장을 檢이 업무수첩이라 해" #안종범 수첩 증거능력 일부 부인한 대법 판례본 듯 #"직접 들었다면 증거, 전해들었다면 증거 아냐"

송철호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23일 기자회견을 본 한 현직 판사와 전직 검사가 전한 말이다.

송병기, 법률자문 받았나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핵심 피의자인 송 부시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입수한 자신의 수첩에 대해 "검찰이 단정하고 있는 업무수첩이 아니라 풍문을 담은 일기 형식의 메모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송 부시장은 기자회견에서 검찰의 도·감청 의혹도 제기했다. 파급력이 클 수 있는 이슈였지만 이날 처음 언급된 것은 도·감청 의혹이 아닌 수첩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그만큼 송 부시장에겐 이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는 뜻이다.

송 부시장은 최근 5차례 이상 검찰 조사를 받았다. [뉴스1]

송 부시장은 최근 5차례 이상 검찰 조사를 받았다. [뉴스1]

송병기의 증거 부인전략 

법조계에선 송 부시장의 이날 기자회견이 "검찰이 확보한 자기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인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난 8월 대법원의 안종범 업무수첩 판례를 참고한 것 같다"는 말도 나왔다.

이번 검찰 수사의 스모킹건이라 불리는 자기 수첩의 효력을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특정인의 수첩이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업무 내용이 적힌 업무수첩인지, 송 부시장의 말처럼 풍문 등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해들어 적은 메모장인지에 따라 증거능력을 다르게 부여한다.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 설립과 활동을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10월 3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조위) 설립과 활동을 방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10월 3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안종범 수첩' 판례를 보다 

지난 8월 대법원의 국정농단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이뤄진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에 대한 증거능력 판단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대법원은 국정농단의 '사료'라고 불린 업무수첩에서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지시받아 적은 내용만 증거로 인정했다. 그외에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 등을 통해 박 전 대통령과 독대한 재벌 오너들의 말을 적은 내용의 증거 능력은 부인했다.

그 내용의 신빙성은 업무수첩이 아니라 말을 직접 했던 재벌 오너들이 확인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8월 29일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 자리에 앉은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8월 29일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 자리에 앉은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의 모습. [연합뉴스]

형사소송법 제315조에 따르면 법원은 ▶공무원이 작성한 문서 ▶상업장부, 항해일지 등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 ▶기타 특히 신용할만한 정황에 의하여 작성된 서류 등만 증거능력을 인정한다.

대법원은 안 전 수석의 수첩에 담긴 내용 중 본인이 대통령에게 직접 지시받은 것이 아닌 이상 제315조 3항 '기타 신용할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로 보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다.

재경지법의 한 현직 판사는 "송 부시장이 실제 재판에 넘겨질 경우 자신의 수첩에 대한 증거능력을 따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때 재판부는 안 전 수석의 대법원 판례를 참고할 것"이라 말했다.

이세민 전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지난 4월 1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동부지검을 나서고 있다. 사진은 이 전 경무관이 지난 2013년 김 전 법무부 차관 관련 의혹 사건 수사 당시 내용을 기록한 업무수첩이다. 김학의 수사 당시도 업무수첩은 중요한 수사 자료였다.[뉴스1]

이세민 전 경찰청 수사기획관이 지난 4월 1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동부지검을 나서고 있다. 사진은 이 전 경무관이 지난 2013년 김 전 법무부 차관 관련 의혹 사건 수사 당시 내용을 기록한 업무수첩이다. 김학의 수사 당시도 업무수첩은 중요한 수사 자료였다.[뉴스1]

"BH회의도 풍문인가" 

법조계 일각에선 이날 송 부시장의 기자회견에 대해 "납득하기가 어렵고 수사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해당 수첩에는 BH(청와대) 회의'와 'VIP(문재인 대통령)' 등이 수차례 적혀있지 않느냐"며 "BH회의를 누가 단순 풍문이나 단상이라 생각하겠느냐"고 말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해당 수첩이 업무수첩이냐 일기장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수첩에 송 부시장이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수첩에 풍문과 단상 등이 담겨있더라도 송 부시장이 직접 지시받거나 들은 내용도 함께 적혀있다면 그 부분에 한해선 증거의 효력이 인정된다는 뜻이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2014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이던 송철호 후보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지원유세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문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2014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이던 송철호 후보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지원유세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문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檢 "변수 될 수 없다"

검찰은 송 부시장 수첩의 성격이 향후 수사의 변수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 측은 "송 부시장의 수첩은 수사의 단초가 될 뿐 이 메모를 바탕으로 추가 수사를 통해 다른 증거들을 확보해가고 있다"고 밝혔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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