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의 『평화만들기』·윤주상의 『별』|「삶의 불구성」을 은유적으로 형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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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필행위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의 장르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만이 갖는 필연성 때문이다. 이때 필연성이란 진실을 제시하는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언어가 지닌 기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기호체계라고 말하나 예를 들어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의 언어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능으로서의 언어-기호학적 용어로 소위 의사소통으로서의 언어와 의미작용으로서의 언어는 다르다. 시와 산문의 본질을 설명해 낸다는 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이지만 시가 의미작용의 기능에 관련되는 언어 행위이고 산문이 의사소통에 관련되는 언어행위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절망적이다』고 표현하는 것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기본적으로 이 두 언술에 시인의 어떤 메시자가 담겨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는 의사소통에 관련되고 있으며, 후자는 「절망」과 「무너지는 하늘」이 만들어내는 의미작용에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후자와 같은 언어 행위를 시라고 한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나 도덕, 또 그 어떤 진실한 현실 고발이 담겨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의사소통의 기능으로서만 작용한다면 작자가 아무리 시라고 우겨대도 그것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오늘의 우리 시단을 가치 평가하는데 있어 왜곡되어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인 것이다.
이 달 젊은 시인들의 발표 시들 가운데 이 의미작용으로서의 기능이 적절하게 살아 작품상의 성공을 거둔 예로 김용범의 『평화 만들기』(현대문학9월 호)와 윤주상의 『별』(세계의 문학 9월호)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시인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우리 시대 삶의 고난과 그 인간적 불구성이다.
산문이 아닌 까닭에 시인들은 그 「삶의 고난과 인간적 불구성」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령 「비둘기들의 절반은 한 발을 못 쓰거나 아예 발가락이 잘려 있다는 사실을, 비닐끈에 감겨서 조금씩 조금씩 발가락이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평화 만들기』)과 같은 시행이나 「너희는 우리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우는 자와 웃는 자 오른쪽과 왼쪽 남과 북 등으로/늬들보다 더 복잡하게 갈라져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별』)와 같은 시행 등에서 유추될 수 있는 바처럼 그것이 이 시대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병리현상의 간접적인 고발임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들의 시 역시 우리 시단의 일반적 추세처럼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보다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시가 이루어놓은 의미작용의 측면이다.
『평화 만들기』에서 그것은 이 시대 우리 삶의 불구성이 발가락이 잘려 나갔거나 비닐 끈에 발목이 매어 있는 「비둘기」들과 관련될 때 이루어내는 의미참조라 할 수 있고 『별』에서 그것은 하늘의 별과 지상의 「우리(인간)」가 시선을 마주침으로써 만들어내는 의미창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은유로 형상화시킬 수 있었던 시인의 세계관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오세영 <시인·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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