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시나리오 복덕방' 온라인에 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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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자기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는 박찬욱 감독은 늘 이렇게 말한다. "어디 좋은 작가 없나? 시나리오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난 연출만 하고 싶다."

굳이 박 감독 예를 들지 않아도 좋다. 좋은 영화의 근간은 좋은 이야기, 좋은 시나리오다.

충무로는 좋은 시나리오 찾기에 열을 올리지만 '물건이 없다'는 푸념이다. 작가, 혹은 무수한 작가 지망생들은 영화사의 높은 문을 원망한다. 한 해 5~6차례 열리는 공모전에 기대를 걸거나 알음알음 영화사 문을 두드리지만 기회 자체가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이 주목받고 있다(www.scenariomarket.or.kr). 올 초 본격적으로 문을 연 국내 최초의 시나리오 상설 시장이다. 그간 영진위가 실시해 온 시나리오 공모전과 DB사업을 결합한 것이다. 오프라인으로 제한된 기간만 열리는 공모 대신에 온라인 상설 판매 중계로 개념을 바꾼 것. 영화사와 작가들이 직접 만나 시나리오의 영화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특히 시나리오 작가들의 저작권 보호에 방점을 찍었다. 영진위 측은 "외국처럼 시나리오 판매를 대행하는 전문 에이전시 시대를 여는 첫 단계"라고 밝혔다.

작가.영화사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다. 올 초 문을 연 뒤 현재 600여 명의 작가와 200여 개 영화사가 회원으로 가입했다. 대다수는 신인이지만 이름 있는 기성작가도 상당수다. 올 들어 거래된 편수만 16편. 싸이더스 FNH, 영화사 봄, 청년필름, 씨네월드 등 굵직한 영화사들이 작품을 사들였다. 시나리오DB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마켓 기능을 도입한 2004년 하반기로 거슬러 가면 판매 편수는 28편에 이른다. 그중 3편이 영화화됐다. 조승우.강혜정 주연의 로맨스물 '도마뱀', 한석규.이문식 주연의 잔혹극 '구타유발자들'은 이미 개봉했다. 서영희.박인환 주연의 '무도리'는 현재 촬영 중이다. 자살 명당으로 소문난 산골마을에 몰려든 자살 지원자들과 주민들 간의 소동을 그린 휴먼 코미디다.

1977~2005년까지 28년간 영진위 공모전 입선작 134편 중 영화화된 작품이 23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성과다.

또 시나리오 마켓에서는 외부 심사위원을 위촉해 1년에 4차례 우수작 심사도 한다. 3편에 대해서는 총 20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준다.

영진위 국내진흥팀 최은경씨는 "마켓의 상업적 성격 때문에 재능 있는 작가 발굴이라는 공모의 본래 기능이 줄어들까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예술성 있는 작품은 작품대로 나오고, 당장 영화화가 가능한 상업적 아이템은 그것대로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 거래 가격의 표준화, 허술한 작가 저작권 보호 강화 등 합리적 시스템 마련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영진위 마켓에서 거래되는 작품 가격은 대략 2000만~3000만원 선. 큰 영화사 공모 상금이 2000만원선이고 500만~1000만원에 거래되는 시나리오도 있는 것에 비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평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들의 저작권 확보 문제. 보통 영화사들이 작가에게 고료만 주고 저작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 현실과 달리, 영진위 마켓에서는 계약서에 저작권 부문을 명기해 놓고 있다. 방송.영화를 두루 겪은 한 작가는 "방송에서는 신인이라도 재방송.해외수출에 대한 저작권을 다 인정해 주는데 영화 쪽에서는 아예 계약서에 저작권 포기 조항이 있을 정도"라며 "영진위 마켓이 영화사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작가들의 처우 개선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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