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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핏줄 같은 민족」인식이 열쇠|도약의 걸림돌-갈등의 뿌리와 해소 방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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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문자인「갈」은 칡덩굴을,「등」은 등나무를 가리킨다. 둘 다 꼿꼿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무엇엔가 어지럽게 휘감고 얽혀드는게 본질이자 속성으로 돼 있다.
따라서 두 글자를 아우른「갈등」의 사전적 풀이는『일이 까다롭게 뒤얽혀서 풀기 어려운 형편을 이르는 말』혹은『서로 불화하여 다툼』등으로 나타나다.
갈등이 갖는 이 같은 부정적 합의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심성과 가치관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사회에서 이의 존재는 필연적이며 또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갈등의 도>
문제는 갈등의 정도에 있다. 적당한 갈등 상태는 사회의 발전과 활성화를 돕지만 그것이일정한 수위를 넘어서게 되면 사회는 질서를 잃고 근본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갖가지 유형의 갈등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념갈등·세대갈등·지역갈등·계층갈등·성 갈등 등 인간들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갈등에 의한 삐걱거림과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세대간 갈등이다. 일찍이 루이스 코저는 해소를 전제한 갈등의 순기능론을 주창한바 있지만 우리사회가 내재된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없이 그냥 안고 나갈 경우 머지않아 되돌릴 길 없는 와해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미소간에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고『이념보다 빵 문제가 급하다』는 뒤늦은 자각으로 중소는 물론 동구권 여러 나라들이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는 등 세계 각국이 탈 이데올로기화로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유독 우리만은 이념을 둘러싼 여러 형태의 갈등으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국민에너지 소모>
남들이 이미 60∼70년대에 이념적 갈등을 대충 해소하고 이제는 날로 격심해지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진하고 있지만 우리는 막무가내로 이러한 내부갈등에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무정부상태였던 해방이후의 정국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미군철수 운운하는 자는 민족의 반역자다」-최근 서울 곳곳의 육교 등에 걸렸던 플래카드의 글귀는 현재의 이념을 둘러싼 갈등을 잘 말해주고 있다.
6·25이후 일단 겉보기에는 잠잠해졌던 좌우 이념논쟁이 다시 불붙게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8월 정신문화연구원 양동안 교수의「이 땅의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논문이 발표되면서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우익들이「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9욀 들어서는 전교조 울산지부 사무실과 마창 노련 사무실 피습사건이 터지는 등 이념을 둘러싼 테러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기반 뿌리째"흔들">
이념간의 갈등만이 아니다. 우리경제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는 노사분규, 학부모들까지 두편으로 나뉘어 팔을 걷고 나서는 전교조 사태 등 우리사회의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또 토지공개념 등을 둘러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미 UIP사의 직배를 둘러싼, 뱀 소동이나 테러 사건 등 이해집단간의 갈등도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해결책은 과연 없는 것인가.
『현재의 갈등은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과 변화로 기득권을 잃게되는 세력간의 다툼』이라고 고려대 강만길 교수는 진단하고있다.
그는『특히 이념적 갈등은 분단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며 여타의 갈등은 역사가 흘러야 할만큼 충분히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해 민주화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6·29이후 민주화가 진행돼 가면서 그간 억눌리고 소외됐던 계층들의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표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수순으로 치부하기에는 현재의 갈등구조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 경우 모든 갈등구조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요소가 있다.
바로 나와 주장이나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흑백논리와 개인, 나아가 집단의 형태로 나타나는 극심한 이기주의다.

<보-혁 세력간 다툼>
흑백논리와 이에 따른 강경주의는 대립되고 있는 당사자들의 갈등을 증폭시켜 불법·폭력화시키고 있고 이기주의는 극장가 뱀 소동에서 보듯 나에게 이득이 되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구조가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해결의 방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얽혔을 때 양자의 의견을 절충·조정할 세력이 없는 것이다.
또 조정하려 해도 당장 회색분자나 사쿠라로 몰리는 풍토도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동국대총장 구속사태에서 보듯 정부나 사법부가 거중조정을 한다해도 당사자는 좀처럼 승복하려들지 않는다. 누구나 따라야 하고, 따를 마음이 내키는 가치 기준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작정「시간이 충분히 흐를 때까지」기다릴 수만은 없다. 그때까지 치러야할 대가가 너무 엄청나고 또 그런식으로 국가적 에너지를 낭비해도 좋을 만큼 우리에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 고영복 교수는『이제는 국가이익을 위해 서로가 한 발짝 씩 양보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전제하고『그러기 위해서는 좌건 우건, 여건 야건, 보수건 혁신이건, 가진 자건 못 가진 자건 모두 같은 핏줄, 같은 국민이란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을 인정할 줄 아는 풍토속에서 누구나 따를 수 있는「공동의 틀」이 하루 빨리 마련돼야 하며 이 틀을 근간으로 민족적인 비전이 제시돼야 현재의 갈등구조가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극심한 경쟁사회>
이 같은 이념의 갈등 외에도 우리사회에 만연해있는 세대간 갈등의 모습은 또 어떤가.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6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달리 유래를 찾기 힘들만큼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의 도정을 달려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 와중에서 전통의 규범은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새로 경기의 규칙을 마련할 여
유도 없이 극심한 경쟁사회가 그 뒤를 이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저곡가·저임금으로 시달리고 있는 농민과 노동자의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들을 이 사회의 소외계층으로 남겨놓았다.
사회학에서의 세대산정은 10년을 단위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10년으로 끊은 우리사회의 연령군을 살펴보면 각 세대가 겪은 체험의 층차가 몹시 크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60대는 식민지통치와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며 50대와 40대 후반은 행동은 아니나마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며 자란 세대였다. 그들보다 조금 아래인 40대 초반과 30대 중반은 50∼60년대의 극심한 가난을 전세대가 함께 겪었다.

<넓어진 소외계층>
적어도 이들 세대의 일관된 가치는 가난의 극복이었고 그들은 경제적 부야말로 곧 선이라는 등식의 신봉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구조와 그것의 외연인 비민주적 제도는 이른바 「눈뜬 소수」에만 고통으로 작용했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피했다.
30대 초반과 20대는 어느 정도 가난이 씻겨진 토양 위에서 자라났다.「입시경쟁=출세=돈」으로 이어지는 제도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이들 세대의 특징은 다소 복합적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양분법을 적용해 본다면 이들의 한쪽에는 격심한 경쟁사회가 빚어낸 이기주의의 전형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들의 빡빡한 이해타산 문화는 대부분의 권위를 무색하게 했으며 가족간·세대간·사제간에 놓인 동양적 윤리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타기할 습속으로 치부되었다.
여기에 대응하는 또 한족은 극렬한 체제비판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통일지상주의자이며 정치일변도의 투쟁 속에서만 존재의 의의를 찾는다. 이들에게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탈과 착취가 횡행하는 타파의 대상이고 정치 또한 분단을 담보로 한 기득권 층의 보호장치로만 비칠 뿐이다.
불행한 것은 어느 세대 건 다른 세대를 비난만 할뿐 이해의 자세를 보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든 세대들은 젊은 세대의 열정을「급진적 좌파 모험주의」혹은「철없는 낭만의 놀음」으로 몰아 붙인다. 이에 대해 젊은 세대는 그들의 윗 세대를 가리켜「몰가치한 보수우익사상에 매달려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갈수록 심화시키는 반역사적 세대」라고 냉소한다.

<실천적 노력 부족>
갈등의 해소를 위한 타협의 필요성이 절실한데도 양쪽이 다 이를 위해 실천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심증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 한상진 교수는 갈등의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갈등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사람 사는 곳엔 이해의 충돌이 없을 수 없고 따라서 각자의 의견·주장을 반영, 설득과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는 갈등의 양성화, 제도적 수렴이야말로 한 사회가 혁명적 내연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모든 여론은 매스컴의 공정한 보도를 통해 가시화돼야 하며 국회는 이를 수렴해 정책에 적절히 반영시켜야 한다. 계층간·세대간의 충돌은 대화를 통한 타협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14세 소년이 학교는 고사하고 노동현장에서 중금속 중독으로 숨져 가는 환경에서는 대화란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구사대의 각목보다 분신이라는 극한상황을 몰고 온 원인이 어디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자세가 소중한 것이다.
같은 맥락이지만 땀흘려 일하고도 부채만을 걸머지게 되는 농민들의 구조적 삶에 대한 이해의 노력없이 이농화 현상만을 개탄한다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일까.

<경쟁규칙 지켜야>
세대간 혹은 이념의 갈등에 덧붙여 영·호남간의 지역갈등은 차라리 비극적이다. 이를 이용하는 정치는 붕당과 파당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정당선택이 이루어지지 않고 고향을 따지고 자신의 호주머니 사정을 따져 정당을 택하는 사회에서는 의회정치는 설 곳이 없으며 혁신의 기반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 이각범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갈등해소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경쟁 사회이며 경쟁의 원칙은 규칙의 준수에 있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기가 종내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변하는 건 자명한 일이다』<이헌익·유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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