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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의 90년대 향한 정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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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화 변혁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오랫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는 민주화와 함께 여러 갈래로 터져 나오기 때문에「민심이 곧 천심」이란 옛 잠언을 간단히 인용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집단마다 자신들의 주장이 곧 민심이요, 천심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와 같은 갈등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신문이 마땅히 발휘해야 할 사회적 기능은 겸허한 자세로 귀를 기울이고 언론인의 직업적 양식에 따라 이 목소리들을 정리·보도하며 나름대로 시비를 가려 일관된 입장을 제시하는데 있다. 그와 같은 비판적·향도 적 보도활동이야말로 정보의 1차적 수문장으로서의 언론에 국민들이 거는 기대일 것이다.
오늘 창간 24주년을 맞아 중앙일보는 그 본연의 기능을 과연 제대로 수행해 왔는지 자문하고자 한다. 유신이래 오랜 권위주의가 강요한 불가항력적 바깥 요인이 어쩔 수 없는 제약을 가했었다던가, 그런 악조건 아래서 그나마 온갖 우회로를 찾아 나름대로 노력하고 희생도 치렀다는 자기변호를 내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과거에 대한 반성을 출발점으로 해서 미래지향적 자세와 노력으로 독자들 앞에 보다 공정하고 책임감 있는 지면을 제공하도록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향한 도약대가 될 90년대의 문 앞에 서 있다.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에 적응하고 동시에 민주화·산업화, 그리고 통일과업의 긴 과정에 놓인 거대한 분수령 위에 서 있다.
여기서 우리 사회가 순조로운 전진을 하느냐, 침체의 늪에 빠지느냐, 아니면 최악의 경우 암울했던 과거로 뒷걸음질치느냐는 국민적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국민 누구도 방관자일 수 없는 엄중한 선택이고 도전이다.
이 도전 앞에서 망설이거나 패배한다면 지금까지 어렵게 이룩해 놓은 경제 성장이나 민주화로의 전진이나 통일에의 염원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언론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여를 하겠다는 다짐을 재삼 확인한다.
우리가 선 이 시점의 분수령 적 의미 때문에 미래에 대한 우리사회의 총체적 의지와 집념은 과거에 대한 한풀이보다 훨씬 더 큰 무게를 갖는다. 우리사회는 빨리 과거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전진을 시작해야 한다.
소련과 동구권에서는 탈 이념·경제 우 선의 실용주의가 힘찬 요동을 치고 있고, 국제적으로 화해의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의 지구 화 와 블록화가 동시에 급속히 진행중이다. 이런 세계사의 진 운 앞에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과거에 묶여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다.
민주화는 우리가 6·29선언이래 수없이 겪어 온 갈등의 확산과 좌절이 보여주었듯이 점진적·평화적 개혁을 통해 이룩하는 길밖에 왕도가 없다.
목전에 임박한 90년대와 21세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줄 사회체제의 기본이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이상 이를 토착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도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권위주의의 배격뿐 아니라 과거의 한을 빌미로 한 독선과 급진주의의 배격을 요한다. 오랜 세월동안 쌓여 온 갈등과 모순과 불균형을 조화시키는 작업은 혁명을 원치 않는 한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을 인내하며 화합을 이루는 노력과 과정 자체가 민주화개혁의 뼈대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마치 정치만이 우리 사회의 모든 뒤틀림을 함축하고 있고 이것만 풀면 모든 것이 잘 될 듯이 착각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경제·사회·문화·도덕 등 모든 분야에 걸친 가치관의 붕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정치가 제갈 길을 못 가고 국민의 목소리가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두드러 진다. 지역간 노사간-세대간-도농 간의 갈등에 무시 못할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이다.
산업화의 부작용은 그러나 양자택일의 여지를 주지 못했다. 성장이 계속되어야 분배가 가능하다. 성장도 하고 분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양자간의 균형이 어느 선에서 잡히느냐로 90년대, 나아가서는 21세기로 나아가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합의와 화합이 이루어지느냐 않느냐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 야할 길은 자유와 번영과 복지가 균형 있게 충족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성장의 범위 안에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을 뜻한다.
통일 문제는 모든 겨레의 염원이지만 현실적으로 그 전망은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는 밝은 것이 못된다. 이러한 현실감각을 잃고 이상론에만 몰두할 때 통일의 가능성을 오히려 후퇴시킬 모험주의에 빠질 수 있음을 우리는 지난여름 뼈저리게 체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간의 오랜 불신을 씻고 상호 신뢰감을 회복하기 위해 대화와 교류는 계속해야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냉철한 점진주의가 요구된다.
우리 사회가 거대한 도전과 호기를 동시에 안고 있는 90년대를 맞으면서 중앙일보는 이 큰 변혁의 흐름이 한반도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한국 민이 자부심을 갖고 세계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되리라는 낙관적 확신을 갖고 이 목표를 향해 언론이 당연히 해야 할 모든 사명을 더욱 굳은 결의로 수행할 것임을 독자 앞에 다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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