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처가에 맡기고 … '기러기 아빠' 의 안타까운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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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름이 왜 여기 있어? 아빠 죽은 거야?"

20일 서울 송파구 경찰병원의 장례식장. 19일의 잠실 나우고시텔 화재로 숨진 손경모(42)씨의 아홉 살배기 쌍둥이 딸 지수.혜수가 희생자 명단을 보며 물었다. 이를 지켜보던 손씨의 처남 이정호(40)씨는 "한 달에 한 번 겨우 보는 아빠였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하게 됐다"며 "오는 토요일이 아빠 만나는 날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회사원이던 손씨는 10년 전 학원 강사였던 아내(42)와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쌍둥이를 낳은 뒤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잡화점을 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가게가 어려움을 겪자 손씨는 쌍둥이 딸을 전남 구례의 처가에 맡기고, 살던 잠실 주공아파트를 팔아 아내에게 피부 마사지 업소를 차려줬다. 자신은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지내며 운전연수 강사로 나섰다. 친구의 오피스텔도 여의치 않아지자 불이 난 고시텔에 1년 전 입주해 홀로 지내며 생계를 꾸려왔다. '생계형 기러기 아빠'였던 셈이다. 아내는 남편의 영정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넋이 나간 표정만 지었다.

서울의료원에 안치돼 있는 조지연(32.여)씨의 오빠 보연씨도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경제적으로 힘들어 가족이 같이 살았던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평생 고생만 하다 이렇게 떠났다"며 말끝을 흐렸다. 조씨는 어려운 집안 탓에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벌기 위해 부산.서울 등지를 떠돌며 갖가지 일을 했다. 두 달 전까지 신림동 고시원에서 살던 조씨는 잠실에 있는 여행사에 취직해 불이 난 고시텔로 옮겨왔다 변을 당했다. 배수준(39)씨 등 6명의 다른 희생자도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거나 일용직으로 일하는 등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 평짜리 고시텔을 선택했다가 화를 입었다.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송파경찰서 관계자는 "희생자들은 고시생이라기보다 저소득 계층으로 싼값에 고시텔을 숙소로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경찰은 불이 노래방에서 발화한 것으로 잠정 결론 내리고 확실한 화재 원인과 건물주의 소방법.건축법 위반 여부를 수사 중이다.

권호.김호정 기자

◆ 사망자 명단=박승균(52), 안영배(32), 윤석칠(35), 배수준, 손경모, 문미(26.여), 장수진(22.여), 조지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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