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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사업? 돈돼도 접는다" 아폴로 반사경 만든 기업의 신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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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설치한 레이저반사면.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 헤래우스가 반사판의 소재인 석영유리를 공급했다. [사진 나사]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표면에 설치한 레이저반사면.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 헤래우스가 반사판의 소재인 석영유리를 공급했다. [사진 나사]

지난달 13일 찾은 독일 하나우시 헤래우스 이노베이션센터엔 한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69년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 우주인 버즈 올드린이 달 표면에 레이저 반사장치를 설치하는 장면이다.

[히든챔피언의 비밀] #독일 대표 ‘히든 챔피언’ 헤레우스 #산업용 귀금속 자동차 회사 공급 #연 26조원 매출, 압도적 세계 1위 #“신시장 계속 찾아야” 150개국 지사

50년이 지나도 작동 중인 이 반사경 소재는 헤래우스가 만든 석영유리다. 당시 미국 우주항공국(NASA)가 선택할 정도로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산업용 소재업체 헤래우스는 독일을 대표하는 ‘히든 챔피언’이다.

‘축적의 시간’만큼이나 중요한 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1851년 플래티넘(백금) 가공기술로 창업한 헤래우스는 각종 산업용 귀금속 가공분야의 압도적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헤래우스는 용광로에 백금을 녹이는 가공기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양산한 뒤 이를 통해 번 자금을 소재 산업에 재투자해 지난해 기준 매출액 203억 유로(약 26조원)라는 초(超)일류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독일 하나우에 있는 헤래우스 정문. 1851년 이 자리에서 창업했으나,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돼 전후 복구했다. 일부 벽돌은 창업 당시의 것이다. 하나우(독일)=김영주 기자.

독일 하나우에 있는 헤래우스 정문. 1851년 이 자리에서 창업했으나,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돼 전후 복구했다. 일부 벽돌은 창업 당시의 것이다. 하나우(독일)=김영주 기자.

촉매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는 산업용 플래티넘 소재를 앞세워 헤래우스는 독일 고급차 3사를 비롯해 글로벌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11개 사업파트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데, 귀금속 거래를 제외한 사업부별 평균 매출액은 약 5억 유로(약 6800억원)이다.

각 사업 분야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 품목을 1개 이상씩 갖고 있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헤래우스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랑크 스티츠 전자부문 대표는 “귀금속 가공부터 전자·반도체·석영유리·태양광 등 11개 분야에서 세계 1위 품목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래우스의 반도체용 초극세사 와이어 드로잉 머신. [사진 헤래우스]

헤래우스의 반도체용 초극세사 와이어 드로잉 머신. [사진 헤래우스]

창업은 19세기지만, 회사의 모태는 1660년 하나우에 문을 연 약국에서 출발한다. 창업자 집안에 화학자가 많아 백금 가공기술 양산화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기업으로 성장한다. 360년 역사와 ‘초일류’를 향한 집념이 오늘날 히든 챔피언이 된 비결이다.

헤래우스는 창업 이후 ‘창의와 혁신을 앞세운 다이내믹 경영’을 사업철학으로 삼고 있다. 수익이 나더라도 1등이 아니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게 이들의 사업방식이다. 2017년 세계 시장점유율 2~3위권에 있던 ‘금속 타깃 소재’ 분야를 미국 기업에 매각한 게 대표적이다.

헤래우스코리아 측은 “금속을 튕겨서 증착시키는 기술로 헤래우스가 보유한 백금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매출은 꾸준히 올릴 수 있었다”며“하지만 기술 차별화가 크지 않다는 판단하에 경쟁사에 사업을 매각했다”고 말했다. 당장 돈이 되더라도 압도적인 기술이 아니면 과감하게 버린다는 헤래우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공격적인 인수·합병(M&A)도 헤래우스가 ‘세계 1등’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이면엔 독일 기업 특유의 정확한 분석력이 있다. 스티츠 대표는 “시장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 미래 성장이 가능한지 판단해 M&A를 한다”며“미래를 내다봐야 가능한 일이다”고 말했다.

금은 등을 소재로 만든 헤레우스의 '본딩 와이어' 제품. 반도체 패키징 등에 쓰인다. [사진 헤래우스]

헤레우스 은 소재 제품. [사진 헤래우스]

각 사업부를 독립채산재로 운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스티츠 대표는 “대기업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신시장을 찾아 나서는 프런티어(개척자)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헤래우스는 1984년 한국에 진출하는 등 전 세계 150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김창권 전주대 물류무역학과 교수는 “기술 전문화와 글로벌 진출은 독일 히든 챔피언 기업의 공통적 특징”이라며 “시장을 좁게 정의하면서 기술 격차를 벌린다”고 말했다. 장성규 헤래우스코리아 대표는 “글로벌 1위는 미세한 차이로 결정된다. 수 대에 걸쳐 그것만 만들었기 때문에 후발주자가 격차를 좁히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또 “미세한 차이를 유지하려면 최고의 원재료를 써야 하는데 소재가 고부가가치 산업이 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헤래우스 11개 비즈니스 유닛. [사진 헤래우스]

헤래우스 11개 비즈니스 유닛. [사진 헤래우스]

헤래우스는 독일 ‘가족기업 톱10’ 중에도 손꼽히는 곳이다. 지난 160여 년 동안 최고경영자(CEO)는 단 6명뿐이었다. 2013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얀 리너트 CEO는 헤레우스 이사회 이사장의 사위다. 가족기업의 주주는 100여 명의 자손으로 구성되는데, ‘장자 우선’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인재를 CEO로 삼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헤래우스는 무차입 경영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자기자본 비율이 60%가 넘는데 독일 ‘히든 챔피언' 중에서도 드문 사례다. 스티치 대표는 “기술 집약적 기업으로서 투자는 다이내믹하게 하지만, 자금조달은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창업 400년을 맞는 2060년의 목표는 ‘포트폴리오 기업’이다. 스티츠 대표는 “한 사업 분야가 경쟁력을 잃더라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우(독일)=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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