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블랙리스트 재판부 "판사 20년 이런 공소장 처음 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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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건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 3월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동부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건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지난 3월 2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동부지법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판사생활 20년 했습니다만 업무방해죄 공소장에 대화 내용이 이렇게 상세하게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30일 오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재판에 넘겨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의 1차 공판준비기일이 열렸다.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은 공판준비기일에 출석 의무가 없어 나오지 않았다. 재판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송인권 부장판사)는 20여분간 검찰의 공소장 중 변경이 필요하거나 따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을 지적하며 검찰 측에 다음 기일까지 의견을 달라고 말했다.

“공소장 산만ㆍ장황”…공소장 변경 요청

재판부는 “최근 공소장 일본주의 주장이 여러모로 남용되는 측면이 있어 그렇지만, 이 사건도 그럴 여지가 있어 보인다”며 우려를 보였다. 재판부는 공소장에 피고인들의 대화 내용이나 속마음이 따옴표 등으로 기재된 부분 등을 지적하며 “피고인의 인상을 나쁘게 하기 위해 이런 기재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공소사실 자체가 지나치게 장황하고 산만하다”며 검찰 측에 공소장 변경 검토를 요청했다. 공소장 일본주의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하나만을 법원에 제출하고 다른 서류나 증거물은 함께 내지 않아 법관에게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원칙을 말한다.

공소장 일본주의 외에 공소 내용의 세부적인 내용 및 법리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김 전 장관 공소사실에는 당시 환경부 직원을 통해 산하기관 임원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텔레파시로 한 게 아니라 하급자를 통해서 지시했고, 하급자의 행위가 없었다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음에도 하급자 행위에 대한 법적 평가는 전혀 담겨있지 않다"며 김 전 장관과 하급 직원을 공동정범으로 볼 수 있는지 등에 대해 검찰 측에 의견을 달라고 요구했다.

또 재판부는 김 전 장관이 환경부 산하기관 출자회사의 대표이사 인사에 관여한 내용에 대해서 "이 회사가 상법상 민간 회사로 보이는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를 적용할 수 있는 장관의 일반적 직무범위에 해당하는지 의문이 든다"며 의견서 제출을 요청했다.

재판 넘겨진 김은경·신미숙 주요 혐의

재판 넘겨진 김은경·신미숙 주요 혐의

재판부의 요청에 대해 서울동부지검 관계자는 "재판부 지적에 대한 의견을 다음 기일까지 제출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검찰 측은 "재판부가 의문을 가지는 부분은 검찰에서도 이미 충분히 고려해 기소한 부분인 만큼 제출하는 의견서에 입장을 충실히 담겠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수사 관계자는 "공판준비단계에서 수사기록을 전부 볼 수 없는 재판부가 앞으로 쟁점사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의문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다음 공판준비기일을 다음 달 29일로 잡고 양측이 낸 의견을 바탕으로 기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앞서 김 전 장관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17년 6월부터 그다음해 11월까지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의 명단을 만들고 사직 동향 등을 파악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또 환경부 직원들을 동원해 공공기관 임직원들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게 하는 등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ㆍ업무방해ㆍ강요 등의 혐의를 받았다. 사건을 수사한 서울동부지검은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을 지난 4월 불구속기소 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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