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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세우더니 "빨리 갑시다"···그날 화성 7차 사건 일어났다

중앙일보

입력

19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쯤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당시 주소) 주변 도로를 달리던 버스 안. 한 남성이 버스 운전기사에게 "빨리 좀 갑시다"라는 말을 툭 던졌다. 버스 운전기사 A씨(당시 43세)는 남성에게 "바쁘면 택시 타고 다니지"라고 맞받아쳤다. 7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일어난 날 살해 현장을 빠져나가던 '25번 시외버스' 안에서 유력한 용의자와 버스 운전기사가 나누던 대화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용의자와 버스 운전기사 3차례 이상 대화" 

29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추적해 온 하승균 전 총경에 따르면 7차 살인 사건이 벌어지던 1988년 9월 7일 유력한 용의자가 탑승한 버스 안에서 운전기사와 용의자의 대화가 3차례 이상 이뤄졌다. 버스는 용의자를 태우고 수원까지 약 17㎞를 달렸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 형사의 실제 모델인 하승균 전 총경이 19일 경기남부청을 찾았다. [연합뉴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박두만 형사의 실제 모델인 하승균 전 총경이 19일 경기남부청을 찾았다. [연합뉴스]

버스 운전기사가 용의자와 만난 뒤 하루가 지난 1988년 9월 8일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의 한 농수로에서 7차 사건 피해자 안모(54·여)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분석 결과 7차 사건 증거물에서 1994년 처제 살인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모(56)씨의 DNA가 검출됐다.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5차, 7차, 9차 증거물에서 이씨의 DNA가 검출됨에 따라 이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씨 주거지와 15㎞ 이상 거리… 버스 이용 가능성 

'25번 버스'가 지난 27일 1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현장인 현재 화성시 안녕동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 진창일 기자

'25번 버스'가 지난 27일 1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현장인 현재 화성시 안녕동 근처를 지나가고 있다. 진창일 기자

7차 사건은 총 10차에 걸친 연쇄살인 중에서도 이씨가 당시 살던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재 진안동)와 15㎞ 이상 떨어진 외곽에서 발생해 버스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용의자가 버스를 탄 곳은 사건 현장으로부터 약 200~300m 떨어진 곳으로 주변에 인가나 버스 정거장도 없었다.
하 전 총경은 "(용의자가) 농로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버스를 세우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럴 수도 있다 싶었기에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양에겐 딱히 그가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7차 사건 피해자 시신도 확인되지 않을 때였다.

물에 흠뻑 젖은 바지 걷어 올려

용의자가 탄 버스는 종점까지 빠른 길로 곧장 가는 '직행 버스'가 아닌 시골 동네 곳곳을 들리며 천천히 운행하는 '완행버스'였다. 용의자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직행처럼 빨리 가자"고 운전기사에게 요구했다. 하 전 총경은 용의자의 요구에 살인사건 현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범죄자의 심리가 녹아있는 것으로 봤다.

용의자는 버스에 탑승한 직후 버스 앞쪽인 운전석 바로 옆자리에 앉은 뒤 다리를 버스 보닛 쪽으로 올린 뒤 물에 흠뻑 젖은 바지를 걷어 올렸다. 운전기사 A씨는 용의자를 향해 "버스 앞쪽 보닛은 운전기사들에게 밥상 같은 곳이다"고 지적했다. 용의자는 A씨를 마주보면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시비조의 말투로 계속 말을 걸었다고 한다. 용의자는 운전기사 A씨에게 담뱃불도 달라고 해 담배를 피웠다.

"무례한 행동·시비조 말투… 인상 특징 정확히 기억" 

하 전 총경과 버스 운전기사, 안내양이 만난 날은 1988년 9월 9일 오후 1시 30분쯤이다. 하 전 총경은 "7차 사건 목격자인 버스 운전기사와 안내양이 처음부터 용의자를 주목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례한 행동을 하며 시비조로 운전기사에게 말을 걸었고, 진술한 시점도 24시간 이내라 인상특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 몽타주도 7차 사건 직후 그려졌다.

25번 버스는 33년 전부터 이곳 주민들이 수원이나 주변 읍·면으로 가는 주요 교통수단이다. 이씨의 당시 주거지였던 화성시 진안동 주민들도 '25번 버스'를 "연쇄살인이 일어날 무렵 가을이 되면 아녀자들이 밤을 따러 산에 갈 때 자주 이용하던 버스"라고 기억했다.

지난 1986년 12월 21일 발견된 4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가 25번 버스에서 내린 뒤 걷던 길. 4차 사건 발생현장은 유력한 용의자 이씨의 당시 주거지와 10㎞ 이상 떨어져 있다. 진창일 기자

지난 1986년 12월 21일 발견된 4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가 25번 버스에서 내린 뒤 걷던 길. 4차 사건 발생현장은 유력한 용의자 이씨의 당시 주거지와 10㎞ 이상 떨어져 있다. 진창일 기자

경찰은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에서 벌어진 4차 사건도 용의자 이씨의 당시 거주지에서 10㎞ 이상 떨어져 있고 25번 버스가 다니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4차 사건 현장에서 만난 주민 정모(70)씨는 "25번 버스에서 내린 피해자가 집을 바로 앞에 둔 도로에서 200m를 떨어진 논둑으로 끌려가 살해당했었다"고 했다.

화성=진창일·심석용 기자 jin.cha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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