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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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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한에는 장편소설 총서(叢書)가 두 편 있다. 하나는 '불멸의 역사'. 김일성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시리즈다. 우상화와 뗄 수 없다. 그렇다고 전부를 허구(虛構)라 할 수 없다. 북한 체제 특성 때문이다. 1925년 '타도 제국주의 동맹' 결성을 다룬 '닻은 올랐다'(82년)가 내용상 첫 번째. 대단원은 97년의 '영생'이다. 94년 신년사 발표에서 7월 8일 사망까지의 활동을 그렸다. 일본에선 이 소설을 토대로 북한 권부를 분석한 논문이 나왔다.

다른 총서는 '불멸의 향도'. 소설로 된 김정일 통치사다. 영화 사업 현지지도를 소개한 '예지', '속도전'을 다룬 '동해천리' 등등. 이 가운데 97년 나온 '역사의 대하'는 큰 주목을 받은 다큐멘터리 소설. 93~94년 1차 북핵 위기를 다뤘다. 김정일 외에 오진우(인민무력부장), 최광(총참모장)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병사 출신의 작가 정기종. 당시 외교부 실무진을 집중 인터뷰하고 집필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문선규. 직책이 외교부 제1부부장으로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의 협상 카운터파트로 나온다. 강석주 현 외무성 제1부상을 가명 처리했다. 그는 김정일이 수시로 찾아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 북.미 협상 대책을 협의하는 핵 상무조(태스크포스)의 수장이다. 핵심 멤버는 김세환 참사(김계관 부상), 허송 유엔 주재 부대표(허종 순회대사). 소설은 김정일이 "'이 핵 상무조야말로 나의 정예팀, 외교부의 두뇌진'이라고 평가한 전투조"라고 적고 있다. 이 상무조가 김정일 지도 아래 클린턴 미국 행정부로부터 항복 문서(제네바 합의)를 받아낸다는 것이 줄거리다. 대미 승전보라고나 할까.

소설엔 북한 외교의 코드도 숨어 있다. '탈레랑에 의한 프랑스식 웅변과 설득 외교, 비스마르크식 독일의 철의 외교, 처칠식 영국의 타산외교… 그러면 우리 당의 자주 외교는 무엇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까?' 소설은 김정일의 담력에 바탕을 둔 '공격 외교'라고 자문자답한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비난 결의 이후 북한이 어떤 수를 둘지 초미의 관심사다. 대화인가, 맞불인가. 아니면 숨고르기인가.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식의 '역사의 대하' 코드는 9.11 테러 전 클린턴 행정부 때나 통했던 주술(呪術)이다. 미국과 중국, 미.중 관계는 변했고, 바뀌고 있다. 북한이 '역사의 대하(Ⅱ)'를 낼 수 있는 길은 협상뿐이다.

오영환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