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걷은 소련|고르바초프 불안한 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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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85년3월 소련의 새로운 젊은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부터 소련은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고르바초프가 표방한 페레스트로이카는 한마디로 약점 투성이의 병든 초강대국 소련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했다.
소련이 현재의 정체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선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며, 이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21세기 소련은 2류 국가로 전락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위로부터의 개혁>
경제로부터 출발한 그의 개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은 2개의 수레바퀴와 같아서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는 무기력과 침체에 빠진 소련인민들을 각성·분발시키기 위해「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 글라스노스트를 통한 데모크라치아(민주화)를 이룩해 소련사회의 면모를 일신시키려 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정치개혁 초점은 권력의 중심을 당에서 소비에트(의회)로 돌리는 것이다. 즉 소련을 지금까지의 당치 국가에서 법치국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금년 3월 실시된 민주선거에 의해 구성된 소련인민대회는 혁명초기의 소비에트를 재현한 것이다.
개혁주의자 고르바초프의 역량은 외교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신사고 외교」로 불리는 그의 외교는 종래의 동서대립외교에서 탈피, 동과 서가 지구적 입장에서 서로 협조하고 공생하는 새로운 데탕트정책이 그 핵심이다.
87년 미소간 INF(중거리핵미사일)철폐협정 체결, 88년12월 소련군 50만 일방감축선언(유엔총회), 유럽 평화정착을 위한「유럽공통의 집」구상, 모든 국가의 자결권인정(89년6월 서독 본), 아프가니스탄주둔 소련군철수(89년2월)등은 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자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민족주의 충격도>
고르바초프의 신데탕트 외교는 소련이 내부적으로 과도한 군사비지출을 줄이고 이로 인해 남은 자원 및 인력을 경제발전과 민생향상에 투입함이 주목적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의도가 경제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85년 고르바초프 집권당시 연4%의 경제성장약속은 현재 겨우 1∼2%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현재 소련에는 만성적 물자부족, 생산시설의 노후화, 자본부족, 환경오염 등 숱한 경제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여기에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대형사고(예를 들어 체르노빌원전사고, 아르메니아대지진, 탄광파업 등)가 소련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농업생산의 계속된 부진은 오늘날 소련을 세계최대의 식량 수입국으로 전락시킨지 오래다.
또 불합리한 가격제도 유지로 인한 막대한 보조금 지급, 식량·소비재 수입, 생산성을 무시한 과도한 임금인상으로 인한 누적된 재정적자는 이미 1천2백억루블 수준(공정환율로 약2천억달러)을 넘고 있다.
또 다른 위협은 개방에 따라 거침없이 나타나는 사회각계각층의 욕구분출현상. 지난7월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 탄전지대에서 잇따라 일어난 대규모 탄광파업사태는 정부에 막대한 경제적 추가부담을 안겨줬으며 소련산업 전체를 일시 마비시켰다.
특히 최근 더욱 가열되고 있는 소련내 민족주의 열기, 즉 발트3국, 몰다비아·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등에서의 독립·자치요구와 민족간 유혈사태 등이 소련의 존립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개혁·개방은 침체됐던 소련사회·문화를 활성화시켰다. 스탈린에 의해 희생됐던 트로츠키·부하린 등 역사적 인물들이 복권됐고, 솔제니친의『수용소군도』가 공식 발간되고 있다.

<개방 부작용 심각>
그러나 개방의 효과 못지 않게 부작용 또한 크다. 모스크바 등 주요도시엔 서방의 마피아와 같은 조직범죄단체가 출현하고 있고, 마약·포르노 등이 크게 번지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 거의 모든 소련인이 개혁·개방의 필요성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개혁정책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시급히 나타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반개혁적 수구세력들은 당·군·관료 등에 구축해둔 세력들을 규합, 고르바초프로부터 등을 돌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아직도 불안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장래도 가변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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