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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자신의 세계를 구하는 영웅서사다, 벌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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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   [엣나인필름]

영화 벌새 [엣나인필름]

[김진아의 나는 내 재미를 구할 뿐] 가부장적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세계를 구한다.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과 벌새의 주인공 은희의 공통점이다. 차이점은? 전자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후자는 자신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

상가떡집 셋째 딸 은희

은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흐릿한 존재다. [사진 엣나인필름]

은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흐릿한 존재다. [사진 엣나인필름]

1994년. 대치동 상가떡집 셋째 딸 은희의 삶은 고달프다. 늘 바쁘거나 지쳐있는 부모님은 관심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8학군에 떨어져 강 건너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언니는 집안의 문제아, 외고가 목표인 오빠는 집안의 기대주, 막내 은희는 집안의 투명인간이다. 같은 대치동이라도 아이들은 부모님의 직업, 교육수준에 따라 예리하게 나뉘고 열등생 은희는 학교에서도 존재가 흐릿하기만 하다.

1994년 나 역시 어쩌다 대치동에 있었고 은희처럼 투명인간이었다. 대학에 떨어지고 난생 처음 대구를 떠나 멀리 은마아파트 옆 학원으로 유학 온 재수생. 아이들은 청바지 브랜드처럼 나의 소속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너네 아빤 어느 대학 나왔어?”

“......영대”

“진짜? 우리 아빠도 연대 나왔는데!”

나는 연세대가 아니고 영남대라고 고쳐주지 못했다. 그 순간 직감했던 것 같다. 서울은 나를 반기지 않는구나. 내가 살아온 세계와 앞으로 살아갈 세계가 절대 같지 않겠구나. 대치동은 이런 깨달음을 얻기 좋은 동네였다.

빛나기 위해선 싸워야 해

은희에게 "싸워야 한다"고 말해주는 영지 선생님 [사진 엣나인필름]

은희에게 "싸워야 한다"고 말해주는 영지 선생님 [사진 엣나인필름]

은희의 일상에도 균열이 난다. 외삼촌의 죽음, 아빠의 춤바람, 엄마의 무심함, 오빠의 폭력, 친구의 배신, 귀 뒤에 돋아난 혹까지. 붕괴의 조짐이 생생해질수록 자기 생에 대한 애착도 커진다. 소녀는 1초에 80번 날갯짓하는 벌새처럼 필사적으로 불안에 맞선다. 한문학원에 새로 온 영지 선생님, 드물게 자신을 존중해주는 이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도 그래서다. “나도 언젠가 빛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해 줄 사람, 바깥 세상의 비밀을 알려줄 유일한 어른이기 때문이다. 재수시절 나에게도 영지 선생님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덜 위축될 수 있었을까?

“네가 싸워야 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병원에 입원한 은희를 찾아온 영지 선생님의 이 한마디는 빛나기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 싸워야 함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영지 선생님이 불러준 노래 ‘잘린 손가락’처럼 잘려 버린 다리는 등하굣길 타워팰리스 옆 판자촌에서 예감했던 고도성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잘 봐,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부실함과 부조리함이야.’ 은희는 회피하기보다 똑바로 응시하길 선택함으로써 영지의 죽음조차 받아들인다. 동생에게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다 식탁 앞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오빠의 모습과 대비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의 날개짓

영화 '벌새' 스틸컷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 '벌새' 스틸컷 [사진 엣나인필름]

“너 가끔 되게 네 생각만 한다?”

한 차례 우정의 위기를 겪은 뒤 친구 지숙은 은희에게 솔직하게 말해준다. 그때 은희는 “아냐 나 착해!”라고 반박하지 않는다. “내가?”라고 짧게 되물을 뿐이다. 그 후로도 은희는 가족에게, 남자들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을 것이다. 여성은 이기적이란 말을 들을수록 자유와 존엄을 지키며 잘 산다는 의미이므로 나는 안심했다. 아마 은희와 지숙은 지금도 친구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의 날갯짓이 주는 경건함이 있다. 존재감 없는 은희의 안간힘도 그렇다. 꼭 인류를 구하는 것만이 영웅이 아니다. 벌새는 성장서사이자 끝내 자신의 세계를 구해내고야 마는 보편적 소녀의 보편적이지 않은 영웅서사다. 김보라 감독의 바람대로 모든 이들이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영화인 건 말할 것도 없고.

글 by 김진아. 울프소셜클럽 대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책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썼다.


제목  벌새 (2018)
감독  김보라
출연  박지후, 김새벽 외
등급  15세 관람가
평점  IMDb 7.4  에디터 꿀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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