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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기록 세운 국민엄마…언제든 새로운 걸 해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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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달 27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난 배우 고두심. ’진실하게 자기를 다스려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며 ’ 마음이 복잡하면 어떻게 상대의 가슴을 울리겠냐“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난 배우 고두심. ’진실하게 자기를 다스려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며 ’ 마음이 복잡하면 어떻게 상대의 가슴을 울리겠냐“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용남(조정석)이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촬영 땐 가슴이 벌렁거렸어요. 정석씨가 그걸 덥석덥석 해내요. 첫 장면에서 철봉도 정말 잘하지 않았어요? 윤아는 또 코스모스처럼 가늘가늘한 애가 얼마나 잘 뛰어다니는지….”

900만 육박 영화 ‘엑시트’ 고두심 #47년 연기인생 최고 흥행 거둬 #‘최고다 이순신’ 조정석 믿고 출연 #방송3사 연기대상 석권 유일

영화 ‘엑시트’(감독 이상근) 속 후배들 자랑을 늘어놓는 배우 고두심(68)의 모습이 극중 용남 엄마 판박이였다. 청년 백수 용남의 가스 재난 탈출기를 그린 영화는 지난 7월 31일 개봉해, 한 달여 만에 880만 관객을 달성했다. 그의 연기인생 47년 만에 최고 흥행이다.

그가 맡은 현옥은 가스 테러가 있던 날 가족과 자신의 칠순 잔치에 갔다가 아들 용남 덕에 목숨을 구하는 엄마다. 기죽어 살던 아들의 용감한 활약이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모성 연기로, 짧은 출연만으로도 극의 감정선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2년 전 지적장애 아들을 둔 노모로 분한 영화 ‘채비’까지, TV·스크린을 오가며 100편 가까운 출연작 중 절반 이상 엄마 역으로 살아온 내공을 발휘했다. 그를 지난 27일 서울 강남 카페에서 만났다. “제가 평화주의자라 뭐든 따뜻한 작품을 해왔는데, 착한 영화는 (흥행이) 잘 안 되잖아요. 이런 흥행은 전혀 예상 못 했죠.”

영화는 어떻게 봤나.
“VIP 시사 때 봤는데 긴장이 돼서 몸이 막 앞으로 나왔다. 감동도 있고, 온 가족이 보기에 이만한 영화가 없다. 이상근 감독이 이 첫 장편을 8년에 걸쳐 준비했다는 게 가슴이 아팠다. 현장에서도 밤새 고민하고 불쌍할 정도로 절어있더니, 영화를 쫀쫀하게 잘 만들었다.”
전작 ‘채비’나,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등 신인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했는데.
“나도 좀 얹혀서 가고 싶은데 아유, 항상 그렇게 된다. ‘엑시트’는 일단 시나리오가 편하게 읽혔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더라. 그리고 이 감독이 얼굴에 ‘성실’이라고 쓰여 있다. 웃으면 얼굴이 빨개지는 게 거짓말은 못할 것 같았다. 정석씨가 한다기에 믿는 구석도 있었다.”(웃음)
조정석과는 가르마 방향 갖고 싸우는 일상들이 실제 모자지간처럼 자연스럽더라.
“스스럼없는 사이여서 편하게 했다. 옛날에 드라마(‘최고다 이순신’)에서 사위로 나왔는데 작품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가 좋아서 쭉 관심 갖고 지켜봐왔다. 늘 한결같고 현장을 부드럽게 만든다.”
‘엑시트’에서 고두심이 조정석과 자연스런 모자 연기를 하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엑시트’에서 고두심이 조정석과 자연스런 모자 연기를 하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각별한 사람들을 말할 때 그는 ‘진지’와 ‘성실’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이번 영화에선 가족으로 나온 배우들이 대부분 그랬다. 드라마에서 여러 번 만난 남편 역의 박인환은 “연극을 오래 하셔서 호흡이 편하다. 나보다 커서 카메라 잡힐 때 밸런스도 좋다”고 했다. 드라마 ‘전원일기’부터 오랜 사이인 큰딸 역 김지영은 말할 것도 없다. 고된 촬영을 버텨낸 것도 이런 인연의 힘이었다.

그를 ‘국민엄마’로 만들어준 건 ‘전원일기’다. 1980년부터 22년간 방영한 이 장수 드라마에서 그는 양촌리 이장집 맏며느리를 연기했다. 대가족을 건사하던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이번엔 청년실업세대 아들을 둔 현실 엄마다.

어머니 역할에도 시대 변화를 느낄까.
“어느 시대든 헌신하는 어머니들은 있다. 내가 고루하다. 어머니 세대의 생각을 많이 갖고 산다. ‘전원일기’ 영향도 있지. 어떨 땐 그 작품의 무게 때문에 확 뛰지 못하는 게 있다. 그런 모습도 다 ‘고두심’이다.”

제주도에서 고전무용을 하다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지상파 방송 3사 연기대상을 모두 수상한 유일한 배우기도 하다.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포함하면 일곱 번이나 수상했다. “잘났어 정말”이란 유행어를 낳았던 ‘사랑의 굴레’는 1989년 KBS, 30대에 백발의 가야금 명인을 연기한 ‘춤추는 가얏고’로는 1990년 MBC 연기대상을 받았다. 백상은 1993년 ‘아들과 딸’, SBS에선 2000년 ‘덕이’로 수상했다. 2004년엔 KBS의 ‘꽃보다 아름다워’, MBC ‘한강수 타령’으로 각 방송사 대상 2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4년 전 ‘부탁해요 엄마’로 세 번째 KBS 연기대상을 안았다.

서울에 올라와 3~4년을 작은 무역회사 급사로 살다가 도전한 공채 탤런트에도 덜컥 1등으로 합격했다. “내 등록번호가 1513번이었는데 남녀 다해서 42명 뽑았거든요. 내가 1등이라니 너무 놀랐죠. 빼어나게 예쁜 건 아니지만, 배우 하기 좋은 얼굴이라고 하더라고요.”

거상 김만덕의 일대기를 그린 ‘정화’(1977), 사극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1984) 등 드라마에선 이른 나이부터 노역과 엄마 역을 소화해낸 그다. 영화는 달랐다. ‘가족의 탄생’에선 한참 연하인 엄태웅과 연상연하 커플을,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선 대통령 역을 맡았다. “ ‘애마부인’ 제안도 받았었어요. 나신은 자신 없어서 거절했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새로운 걸 해보겠다, 그런 불타는 마음은 있었죠.”

이달 방영하는 새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에선 공효진·강하늘과 호흡을 맞춘다. 젊은 배우들에게 선배 연기자로서 남기고픈 얘기라면.
“진실하게 자기를 항상 다스려야 한다. 안 좋은 게 쌓이면 걸러내고, 좋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려 하라. 인기라는 게 정말 물거품 같다. 계속 오를 것 같지만 다 안개고, 구름이고, 바람이다. 오래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받게 노력해야 한다. 미움도 빨리빨리 풀어라. 미우면 어떻게 눈을 보며 연기하겠나. 다가오지 않으면 먼저 다가가면 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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