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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수 브랜드]① 스타킹이 암거래 사치품이던 시절···처음 국산 만든 건 비비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국의 장수 브랜드]①비비안 고탄력 스타킹 

‘고탄력 스타킹’
현재는 거의 일반명사로 쓰이지만 처음 이 두 단어를 조합해 브랜드화한 것은 남영비비안이다. 1983년, 지금은 너무나 흔해진 탄탄하고 ‘짱짱한’ 스타킹을 만들어낸 것이 큰 자랑거리인 때가 있었다.

1983년 출시된 남영비비안 '고탄력 스타킹' [사진 남영비비안]

1983년 출시된 남영비비안 '고탄력 스타킹' [사진 남영비비안]

52년 창립한 남영비비안은 앞서 첫 국산 스타킹인 ‘무궁화 스타킹’(1958년 출시)을 내놓은 업체다. 우리에게 이렇다 할 제조 기술이 없던 그 시절, 한국 여성이 신는 양말은 주로 목양말이었다. 나일론 스타킹은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사치품이었다. 

남영이 외국 스타킹을 분석하고 연구해 내놓은 결과물이 바로 이름도 정겨운 무궁화 스타킹이었다. 스타킹 천을 짜고 다리 모양으로 이어 꿰맨 형태였다. 다리 뒷선에 봉제선이 까맣게 보이는 게 포인트. 

60~70년대 일반적이던 나일론 스타킹. 탄성이 없어 흘러내리기 때문에 신기가 불편했다.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60~70년대 일반적이던 나일론 스타킹. 탄성이 없어 흘러내리기 때문에 신기가 불편했다.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거슬리는 봉제선을 없애는 기술을 터득한 것은 62년에 이르러서다. 다리 모양으로 완제품으로 짜낸 스타킹, 당시로는 획기적인 제품을 만들어 시중에 내놓았다.

스타킹 봉제선 없애기엔 성공했지만, 또 다른 욕심이 생겼다. 나일론 스타킹은 이름처럼 나일론 100%로 만든 것이라 한번 늘어나면 형태가 돌아오지 않았다. 줄줄 흘러내리고 주름이 잡혀 맵시가 나지 않는 것도 단점이었다.

남영비비안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79년 이탈리아에서 카바링(covering)사를 수입해 고가의 ‘고탄력 스타킹’을 실험 제작했다. ‘착’ 달라붙어 다리 모양을 매끈하게 잡아주는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착용감은 나일론 스타킹과 비교가 되질 않았다. 게다가 꽤 질겨 여러 번 신을 수 있었다. 남영비비안은 83년 야심 차게 ‘비비안 고탄력 스타킹’을 본격 출시했다. 이후 이 제품은 현재까지 6억 켤레가 팔린 비비안의 대표 상품에 등극했다.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우선 가격이 문제였다. 수입 실을사용하다 보니, 나일론 스타킹보다 가격이 2.5배 비쌌다. 신어보지 않고 눈으로 보기엔 큰 차이도 없었다. 결국 가격을 낮추기 위해 카버링사를 자체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스타킹 포장에도 변화를 주었다. 간결하게 고탄력 스타킹의 장점인 탄력성과 견고성을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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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판매량 증가는 드라마틱하다. 초기 한두 켤레씩 팔리던 고탄력 스타킹은 90년에 이르자 600만 켤레가 팔려나갔다. 5년 뒤인 95년 판매량은 연간 5600만 켤레로 거의 10배가 뛰었다. 고탄력에 밀린 나일론 스타킹은 90년대 말 생산을 중단했다. 이후 고탄력의 변신은 거듭됐다. 고탄력 타이츠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레깅스를 쉽게 만들었고, 화려한 색상과 무늬를 넣은 대담한 스타킹도 쏟아졌다. 스타킹이 단순히 추위를 막는 제품이 아닌 패션 아이템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큼지막한 꽃무늬를 비롯해 스트라이프, 도트, 망사 등 다양한 패턴을 적용하여 매 시즌 20가지 이상의 디자인이 나왔다.

'비비안 고탄력 스타킹' 현재 포장. [사진 남영비비안]

'비비안 고탄력 스타킹' 현재 포장. [사진 남영비비안]

최근 남영비비안이 경영권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62년간 모든 국민이 알만한 브랜드를 가꾼 대표적 토종 기업이지만, 해외 업체와의 무한 경쟁, 재기발랄한 신생업체의 도전에 휘청이고 있다.

실적 악화에 대응하기 위한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 등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50년대 무궁화 스타킹, 80년대 고탄력 스타킹을 내놓을 때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믿을만한, 익숙해서 안심되는 오래된 브랜드가 휘청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속상한 일이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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