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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의 시선

‘문의 남자’ 양정철의 박정희 복권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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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찬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박정희 전 대통령이야말로 진짜 친일파, 토착 왜구가 아닌가. 일본 육사를 졸업해 만주군 장교로 독립투사를 토벌하는 데 앞장섰고, ‘목숨을 바쳐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써서 ‘천황 폐하’에게 바치지 않았나. ‘다카기 마사오’, 친일파의 원조, 몸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자유한국당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여당 친일공세 단골소재 ‘박정희’ #양 “공은 인정해야” 신선한 반론 #‘친일팔이’ 극복해야 전쟁 이겨

지난 1일 더불어민주당 146차 정책조정회의. 친문계 김정호 원내부대표가 이렇게 목청을 높였다.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부터 친일, 토착 왜구”라고 비난한 직후 반격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김정호의 발언은 얼핏 감정이 섞인 것처럼 들리지만, 알맹이는 지금 여권 사람들 의식의 핵심을 짚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정의이고 저쪽(한국당)은 무조건 악”이란 흔들림 없는 신념이 그것이다.

이 이분법이 여권 인사들에 고착된 건 뭐니뭐니해도 박정희 덕분이다. 보수세력의 대지주인 박정희가 친일파였기에 보수를 대변하는 한국당은 친일파의 DNA를 버릴 수 없고, 이에 맞서 항일과 민족주의를 추구해온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언제나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다는 논리다. 진보 세력에게 ‘박정희’는 증오의 대상이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해주는 알리바이로 자리매김돼 있다.

하지만 박정희 카드를 남발하면 낭패를 볼 공산도 크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TV토론을 벌이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는 논쟁이 격해지자 “박근혜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뿌리는 속일 수 없다”고 외쳤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정희가 토론에서 밀리니까 주제와 관련 없는 박정희를 들고나왔다”는 비판이 거셌다. 지지율 반등이 어려워진 이정희는 후보를 사퇴했고, 이정희의 ‘박정희 타령’에 냉정하게 대응한 박근혜는 그만큼 점수를 더 따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정희란 이름이 갖는 역사성과 복합적 면모를 무시하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의 복심 중 복심이란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입장이 주목된다. 양정철은 지난해 1월 『세상을 바꾸는 언어』란 책을 내면서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썼다. “역대 대통령은 공과가 함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중략) 그런 면에서 과는 과대로 극복하면 되지 역사 속 인물로서 (박정희) 우표 발행과 동상 설립까지 반대하는 것은 야박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 자신감이나 관용과 포용을 발휘해도 될 만큼 대한민국은 큰 나라로 우뚝 섰고 국민의식도 높아졌다.”

양정철이 이 책을 낼 시점은 집권 초기 문재인 정부 기세가 하늘을 찌를 시점이었다. 그런 만큼 중도 표를 의식해 양정철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때였다. 게다가 당시 문 대통령 핵심 지지층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2017년)을 맞아 추진된 기념우표 발행과 동상 건립을 막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아무리 문 대통령 복심이라지만 대통령 지지층과 반대되는 말을 하긴 어려웠을 텐데도 양정철은 대놓고 박정희 우표와 동상을 허용해주자고 주장한 것이다.

김정호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강경파 인사들은 양정철의 박정희 복권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민주당에 첫 집권당의 영광을 안겨준 김대중(DJ) 대통령은 박정희에게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혹독한 고통을 당한 야당 인사였다. 하지만 박정희와 싸우면서도 그는 박정희의 무게를 인정할 줄 알았다. DJ 청와대에서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측근 장성민은 “DJ는 내게 ‘박정희 때문에 한국인들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어 국민소득 80달러짜리 나라를 1000달러, 10000달러 나라로 만들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런 박정희와 마주 앉아 대화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YS는 여러 번 영수회담을 했는데) 난 박정희와 스쳐 지나갈 기회도 없었다.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고도 한다. 그런 열린 인식이 있었기에 DJ는 지지층의 반대를 돌파해 ‘유신 본당’ 김종필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집권에 성공한다.

지금의 민주당도 DJ의 용단을 직시해야 한다. 문 대통령과 똑같이 진보 노선을 걸었으면서도 DJ는 박정희 세력을 포용하고 일본과 찰떡궁합을 유지한 때문에 숙원인 햇볕정책을 수월히 밀고 나갈 수 있었다.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의 과와 함께 공도 인정하고, 야당을 친일파로 모는 대신 정책 파트너로 삼고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 3위 경제 대국 일본과의 ‘전쟁’은 장기전이다. 지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다.

강찬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