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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양때문에…한반도에서 발발한 '제2차 동서 도핑 냉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국 수영 스타 쑨양(28)이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최초로 4연속 우승을 하는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동(東)과 서(西)로 쪼개진 도핑 전쟁이 또 발발했다. '신냉전' 기류가 다시 흐르고 있다. 현재 신냉전의 주무대는 공교롭게도 과거 냉전시대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한반도다. 2016년 리우올림픽 때 미국·유럽·호주 대 러시아·중국 대결 양상이었다면, 올해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에서는 미국·호주 대 중국의 갈등으로 심화되고 있다.

21일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우승, 최초 4연패를 달성한 중국 쑨양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위를 차지한 호주의 맥 호튼은 도핑 논란을 의식한 듯 시상대에 함께 오르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우승, 최초 4연패를 달성한 중국 쑨양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위를 차지한 호주의 맥 호튼은 도핑 논란을 의식한 듯 시상대에 함께 오르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다. [연합뉴스]

제1차 도핑 전쟁: 2016년 리우올림픽…도핑 양성 반응 쑨양 

도핑 전쟁은 쑨양으로부터 시작됐다. 쑨양은 지난 2014년 5월 도핑검사에서 금지약물인 트라이메타지딘 양성 반응이 나와 3개월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꽁꽁 숨겼고, 그해 9월에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알려지면서 세계 수영계에 논란의 인물로 떠올랐다. 호주의 맥 호튼(23)은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쑨양을 "약물 사기꾼(Drug Cheat)"이라고 비난했고, 보란듯이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쑨양은 은메달을 땄다.

분노한 중국 팬들은 호튼의 소셜미디어(SNS)에 10만 개가 넘는 비난 댓글을 달았다. 중국 수영 대표팀은 호튼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호주 수영 대표팀이 사과를 거부했다. 중국과 호주 언론들까지 설전에 가세하면서 그야말로 중국 대 호주 전쟁이 되어버렸다. 당시 러시아도 대규모 도핑 스캔들로 100명 넘는 선수가 불참했다. 미국, 유럽의 수영 선수들이 러시아, 중국 선수들을 비난하면서 '동서 도핑 전쟁'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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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도핑 전쟁: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혈액병 깬 쑨양 

리우올림픽이 끝나면서 잦아들었던 동서 도핑 전쟁이 다시 시작된 건, 역시나 쑨양때문이다. 지난해 9월 국제수영연맹(FINA)의 위임을 받은 국제도핑시험관리(IDTM) 직원들이 쑨양의 중국 자택을 방문해 도핑검사 샘플 수집에 나섰다. 그런데 쑨양이 혈액이 담긴 도핑검사용 유리병을 망치로 깨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INA는 "검사 절차에 일부 문제가 있었다"며 쑨양에게 경고 처분 징계만 내렸다.

이에 미국, 호주 등 수영 관계자들이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에 버젓이 참가한 쑨양에게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리우올림픽 여자 100m 평영 금메달리스트 릴리 킹(22·미국)은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깨는 사람을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호주 경영 대표팀 자코 베르하렌 코치는 "쑨양의 사례는 도핑방지 시스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은메달리스트 호튼, 쑨양 있는 시상대 오르기 거부

광주 남부대시립국제수영장에서 열린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 시상식에서 2위를 차지한 호주의 맥 호턴(왼쪽)이 도핑 논란에 휩싸인 1위 쑨양(가운데)을 의식한 듯 시상대에 함께 오르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다. [뉴스1]

광주 남부대시립국제수영장에서 열린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 시상식에서 2위를 차지한 호주의 맥 호턴(왼쪽)이 도핑 논란에 휩싸인 1위 쑨양(가운데)을 의식한 듯 시상대에 함께 오르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다. [뉴스1]

이런 논란에도 흔들리지 않은 쑨양은 21일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자마자 두 팔로 물을 치며 포효했다. 그를 응원하는 수 십명의 중국 팬들은 환호했다. 은메달을 딴 호튼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쑨양이 어떤 행동, 무슨 말을 하건 내가 할 말은 없다"고 말을 아끼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시상식에서는 쑨양과 함께 시상대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또 메달리스트 기념 촬영에서는 쑨양과 멀리 떨어져 서서는 웃지 않았다. 이에 대해 쑨양은 "호튼이 내게 불만을 드러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는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나섰다. 쑨양 개인을 무시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중국은 존중해야 한다"고 호튼을 비난했다.

호주 수영 선수 맥 호튼을 비난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 [사진 맥 호튼 SNS]

호주 수영 선수 맥 호튼을 비난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댓글. [사진 맥 호튼 SNS]

그러자 호튼의 SNS는 22일에만 13만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대부분 중국 네티즌들이 호튼을 비난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호튼을 지지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릴리 킹은 "21일 밤 선수촌 식당에 호튼이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수 십 명의 선수가 벌떡 일어나 호튼에서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 모두 호튼의 행동을 지지하고 있었다. FINA의 누구도 (도핑에 깨끗한 선수를) 대변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네티즌들도 호튼의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호주 언론 시드니 모닝 헤럴드가 22일 작성한 '쑨양과 시상대에 함께 오르기를 거부한 호튼'에 대한 기사에는 200여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는데, 호튼을 지지하는 내용이 많았다. 영국 BBC, 미국 워싱턴 포스트 등도 호튼의 행동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21일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시상식 후 쑨양과 기념 촬영은 거부했지만,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의 가브리엘레 데티와는 환하게 웃으면 사진을 찍고 있는 맥 호튼(왼쪽). [AP=연합뉴스]

21일 광주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남자 자유형 400m 시상식 후 쑨양과 기념 촬영은 거부했지만,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의 가브리엘레 데티와는 환하게 웃으면 사진을 찍고 있는 맥 호튼(왼쪽). [AP=연합뉴스]

쑨양 도핑 논란 숨기기 급급한 중국 언론

3년 전 동서 도핑 전쟁에선 언론까지 달려들었다. 그러나 올해 중국 언론은 잠잠하다. 2014년에는 쑨양이 "심장이 안 좋아서 치료 목적으로 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해 중국 언론들도 쑨양을 옹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혈액병을 깨 스스로 검사를 막았다. '금지약물로 기록을 향상시켰다'라는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언론들은 호전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침묵하고 있다. 중국 기자들은 21일 쑨양의 기자회견에서 도핑 질문을 나올까 봐 외신 기자들의 눈치를 봤다. 러시아 이타르타스 통신사 기자가 도핑 관련 질문은 하자, 중국 기자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중국 신화통신은 도핑과 관련한 쑨양의 말을 전하긴 했지만, 쑨양이 비판받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쑨양은 이번 대회에서는 도핑 테스트를 피할 수 없다. 21일 도핑 테스트를 받았고, 그 결과는 23일에 나올 예정이다. 대회 조직위는 그 결과를 볼 수 없고 FINA에게 전달된다. 만약 금지약물에 대한 양성 반응으로 결과가 나올 경우 쑨양은 메달을 박탈당한다.

광주=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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