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첫사랑의 훈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0면

그런데 이런 내 중간치기 버릇은 5학년이 되면서 싹 없어졌다. 도회지에서 전근 오신, 너무나도 예쁜 이수미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은 포도송이처럼 까만 눈동자에 누에고치보다 더 하얀 피부를 가진, 도저히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선녀 같은 분이었다. 열두 살 촌 머슴애의 가슴은 선생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차멀미 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나는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날마다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야생화 꽃다발을 만들어 선생님 책상 위 화병에 꽂아 드렸다. 일요일마다 깊은 산속을 헤집고 다니며 캔 도라지.산더덕 등을 갖다 드렸다. 들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선생님 목에 걸어 드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고맙다며 나를 껴안아 주셨고, 나는 선생님의 향긋한 분 냄새에 취해 언제까지나 떨어질 줄 몰랐다. 예쁜 선생님이 계셔서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빛났다. 나중에는 여름방학 오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방학을 하면 예쁜 선생님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이윽고 여름방학이 왔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꽃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방학 내내 감자 캐고 쇠꼴 베느라 바빴던 나는 개학을 코앞에 두고서야 숙제를 시작했다. 그림 솜씨가 없었던 나는 선생님께 칭찬 받고 싶은 마음에 책에 있는 그림을 베끼기로 했다. 꽃 그림 위에 도화지를 올려놓고 호롱심지에 묻은 석유를 골고루 칠하면 도화지가 반투명해져 밑의 그림을 베낄 수 있었다.

열심히 숙제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졌다. 나는 호롱불을 켜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그만 실수로 등잔을 차고 말았다. 호롱이 넘어지며 기름이 쏟아지는 바람에 불이 붙었다. 불은 내가 어떻게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집 전체로 번져갔다. 그러나 나는 불이 났다는 사실보다 애써 베낀 그림들이 재로 변하는 것에 더 당황했다. 방안에서 나올 생각도 잊은 채 그림들을 챙기려다 그만 얼굴과 팔다리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초가삼간 또한 다 타버리고 말았다.

크게 다친 나는 학교에 가기는커녕 읍내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내가 숙제를 하다 불을 내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님께선 병문안을 오셔선 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환아! 넌 정말 책임감 강한 멋진 아이야, 선생님은 그래서 네가 좋아!"

지금도 내 몸에 흉칙하게 남아있는 번들번들한 화상 흉터를 보면 내가 책임감이 강한 아이였는지 무모한 아이였는지 헛갈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을 향한 내 첫사랑의 훈장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최길환(50.교사.서울 상계7동)

◆ 21일자 주제는 '복날'입니다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과 직업.나이.주소.전화번호를 적어 18일까지로 보내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매달 장원을 선정해 LG 싸이언 휴대전화기도 드립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