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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정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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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주위 사람에게 친절했어요. 다툼 같은 게 없었고 친구들을 더 배려하고 양보해주는 스타일이었습니다.”(대학 친구)

평범한 사람도 괴물 될 수 있는 시대 #인터넷과 모바일에 범죄 정보 널려 #범죄자 압도하는 수사 역량 키워야

“서글서글하고 서비스직에 어울릴만한 말투에 누구에게 나쁜 감정을 살 성격은 아니었어요.”(전 직장 동료)

고유정(36)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잔혹한 범죄 성향이 언제 싹텄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지인들이 기억하는 예전의 고유정은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그가 살해한 전 남편과의 대학 시절 연애 얘기도 건강한 캠퍼스 커플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은 취미 활동을 함께 하며 즐겁게 지내던 모습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서소문 포럼 7/16

서소문 포럼 7/16

둘 사이에 심한 갈등이 처음 포착되는 시기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직후인 2014년 말이다. 전 남편 강모(36)씨가 고유정에 대해 이혼을 청구하면서 당시의 폭력성을 언급했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친척이 방문해 아기의 볼을 쓰다듬었는데 “병균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며 강씨에게 난폭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아이가 돌을 갓 지나 침대에 부딪혀 머리를 다쳤을 때, 밤에 아기를 재우는 문제로 언쟁이 생겼을 때도 그랬다. 시댁과 처가 사이에서도 불편한 일들이 생겼다. 양가 부모가 모두 아이를 보고 싶어 할 때 어느 집으로 데려가느냐를 두고서도 크게 다퉜다.

결국 두 사람은 2017년 5월 이혼한다. 헤어진다고 둘의 관계가 단절될 수는 없었다. 양육비가 쟁점이 되고 접견권이 분쟁이 됐다. 강씨는 법원 결정에 따라 2년 만에 처음 아들을 만난 날 고유정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충격적인 결말을 빼면 이혼 건수가 한해 10만을 넘어서는 이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얘기다.

지난달 25일 고유정에게 살해된 전남편. [중앙포토]

지난달 25일 고유정에게 살해된 전남편. [중앙포토]

이런 정도의 분노를 품은 여성을 광적인 범죄자로 만든 공범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다. 그가 온라인에 접속해 검색한 살인 도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오프라인으로 나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체격이 훨씬 큰 전 남편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여성 혼자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시신 처리엔 스마트폰이 쓰였다. 각종 도구를 모바일로 주문해 제3의 장소로 배달시켰다. 차로 시신을 싣고 가 계획대로 훼손한 뒤 유기했다.

전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이 5월 29일 인천의 한 가게에서 범행 도구를 사는 모습. 연합뉴스

전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고유정이 5월 29일 인천의 한 가게에서 범행 도구를 사는 모습. 연합뉴스

그가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에 경찰이 개입할만한 순간이 있었다. 범행 석 달 전 다섯 살짜리 의붓아들이 숨진 사건이 대표적이다. 멀쩡하던 아이가 피를 쏟고 숨져 있었다. 경찰은 아이와 한 침대에서 잔 현 남편 다리에 눌려 숨졌을 가능성을 거론했지만 현 남편은 고유정이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숨진 지 100일이 지난 지금에야 고유정과의 대질 조사 얘기가 나온다.

한 소아과 전문의는 “생후 4~5개월이면 몰라도 다섯 살짜리가 자다가 아버지 다리에 눌려 사망하는 사례는 보지도 못했고 납득이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함께 집에 있던 현 남편과 고유정을 철저히 조사했다면 석 달 뒤 강씨에 대한 범행은 엄두를 못 내지 않았을까. 작은 심리적 요인이 범죄에 영향을 준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도 있지 않은가.

고유정의 인맥 관계도. [중앙포토]

고유정의 인맥 관계도. [중앙포토]

살해된 전 남편의 동생이 신고했을 때 곧바로 수사에 나섰다면, 범행 닷새 뒤 경찰이 신청한 고유정에 대한 체포영장을 검찰이 기각하지 않았다면,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되는 건 막지 않았을까.

지난달 28일 경찰이 제주 구좌읍 쓰레기매립장에서 ‘전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이 시신을 담아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종량제봉투를 찾고 있다. 인력 65명과 탐지견 2마리가 투입됐다. [뉴스1] 28일 오후 경찰이 제주시 동복리 쓰레기매립장에서 ‘전 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이 범행 후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린 종량제봉투 내용물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고 있다. 2019.6.28. [뉴스1]

지난달 28일 경찰이 제주 구좌읍 쓰레기매립장에서 ‘전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이 시신을 담아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종량제봉투를 찾고 있다. 인력 65명과 탐지견 2마리가 투입됐다. [뉴스1] 28일 오후 경찰이 제주시 동복리 쓰레기매립장에서 ‘전 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이 범행 후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린 종량제봉투 내용물을 찾기 위해 수색을 하고 있다. 2019.6.28. [뉴스1]

고유정 검거 이후 범행 동기와 전모를 밝혀내지 못한 것도 답답하다. 서울지검 강력부장 출신인 김규헌 변호사는 약 30년 전 부친을 흉기와 둔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30대 여성을 설득해 실체를 규명한 사례를 들며 어떻게든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을 엽기적으로 살해하고 함구하던 그 여성은 성장 과정 얘기를 사흘 동안 참고 들어주자 “오빠는 명문대를 보내고 나는 공부도 못하게 한 데 대한 한이 응어리진 터에 명절날 심한 얘기를 듣자 분이 폭발했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가 1일 제주시 제주지검 회의실에서 ‘전 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에 대한 기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가 1일 제주시 제주지검 회의실에서 ‘전 남편 살인사건’ 피의자 고유정에 대한 기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진상 규명을 생각하면 고유정이 선임한 변호인단이 여론의 압박으로 사임한 부분이 안타깝다는 의견도 나온다. 양지열 변호사는 “국선변호인도 얼마든 역할을 잘할 수 있지만 피고인이 신뢰하는 변호인이라면 자백을 이끌어내기에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제 전모를 밝히는 일은 법정으로 넘어갔다. 한 여성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막지 못하고 철저히 규명도 못한 경찰과 검찰은 이번 사건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아무리 치밀하게 범죄를 구상해도 수사기관 앞에선 소용없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만이 또 다른 괴물의 출현을 막는 길이다.

강주안 사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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