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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5년, 정부는 KBS를 욕할 자격이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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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5년 전 세월호 사고가 나던 날 가장 철렁했던 순간은 370명이던 구조자 숫자가 몇 시간 뒤 166명으로 확 줄던 때다. 훗날 공개된 기록은 공무원들도 그 순간 당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의 걱정은 좀 달랐다. ‘큰일 났네. 이거 VIP(대통령)까지 보고 다 끝났는데.’ 청와대 직원의 발언이다. 그는 배에 갇힌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헌법 7조 1항은 이렇게 죽었다.

강원·경남서 무고한 국민 희생 #공무원이 잘했다면 막을 수 있어 #팽목항 앞바다와 무엇이 다른지

지난 16일 진도 팽목항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7시간 뒤 경남 진주에서 12세 소녀를 비롯한 다섯 명이 이웃에게 살해됐다. 충동 범죄로만 알았던 사건은 진상이 드러날수록 정부가 방치한 정황이 나타났다. 안인득의 가족과 이웃은 “큰 사고가 날 것 같다”며 경찰과 보건 당국에 무수히 호소했지만 공무원들은 무심했다. 만약 이들 중 한명이라도 국민의 애원에 귀를 기울였다면 다섯 명은 죽지 않았다. 5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는가.

민갑룡 경찰청장 합동분향소 민갑룡 경찰청장이 지난 18일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한일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진주아파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분향하?? 있다.송봉근 기자 (2019.4.18.송봉근)

민갑룡 경찰청장 합동분향소 민갑룡 경찰청장이 지난 18일 경남 진주시 충무공동 한일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진주아파트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분향하?? 있다.송봉근 기자 (2019.4.18.송봉근)

지난 4일 오후 강원도 고성에서 큰 산불이 났다. KBS는 재난방송에 늑장을 부렸다고 매를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재난방송 주관방송사는 국민에게 재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알려주면서 국민과 재난 지역 주민들이 취해야 할 행동 요령을 상세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으니 KBS 간부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거다. 결국 KBS 통합뉴스룸 국장이 지난 19일 물러났다. 이와 반대로 정부에서는 관련 당국이 산불 대응을 잘했다는 자찬이 나왔다.

서소문 포럼 4/23

서소문 포럼 4/23

그날 밤 신문 제작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입장에서 정부가 대응을 잘했다는 주장을 수긍할 수 없다. 산불이 난 다음 날 청와대·총리실·행안부·기재부·국토부·농식품부·산림청·소방청·교육부·국방부·복지부·산업부·중기부·경찰청·해경청·국립공원관리공단이 현장을 가고 회의를 하고 홍보에 나선 것은 좋았다. 그러나 산불이 타오르던 전날 밤엔 정부 어느 부처에서도 방송사들에 재난방송을 요청하지 않았다. 산불 등 재난이 일어나면 정부는 시스템을 통해 방송사에 재난 방송을 공식 요청하도록 돼 있다. 요청을 받은 방송사는 관련 내용을 내보내고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인근 주민 및 야간 등산객은 안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은 2017년 6월 1일 밤 서울 노원구 수락산에 화재가 나자 정부가 방송사들에 보낸 재난방송 요청이다. 당시 화재로 4㏊ 정도의 산림을 태웠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이보다 작은 불이 나도 정부는 재난방송을 요청하곤 했다. 방송사들은 정부의 지시를 따랐다.

이번 산불의 피해 면적은 고성·속초만 700㏊다. 강릉·동해·인제를 합하면 1700㏊에 이른다. 그 밤 정부 어디서도 재난방송 요청을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정부 관계자는 “산불이 나면 산림청에서 행안부로 요청하고 행안부가 방통위와 과기정통부를 통해 방송사와 인터넷 사업자에게 재난방송을 요청하는데 당일엔 산림청에서 요청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산림청 관계자는 “매뉴얼이 생기긴 했지만 산불이 발생했을 때 방송 요청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관련 부처들이 침묵하는 사이 사상자가 발생했고 가까스로 탈출한 국민도 많았다. 대피한 국민 중엔 “불이 난 줄 몰랐는데 대나무숲에서 ‘뻥뻥’ 소리가 나 밖에 나가보니 큰불이 보여 도망쳤다”는 사람도 여럿이다.
괴이하게도 정부는 산불이 나기 몇 시간 전 강풍과 건조 특보를 이유로 방송사들에 재난방송을 요청했다. 그래놓고 정작 밤에 산불이 나자 입을 닫았다. 이런 당국의 행태는 산불 특보를 방송하다 ‘오늘밤 김제동’을 튼 KBS보다 더 황당하지 않은가.

남양1리 대나무숲이 산불로부터 고령주민 살림

남양1리 대나무숲이 산불로부터 고령주민 살림

식목일이 잿빛으로 덮인 뒤 처음 들린 대책이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이다. 청와대 청원이 쇄도했고 문 대통령은 국가직 전환을 약속했다. 거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정부 대처가 어땠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상을 주고받을 생각부터 하는 모습은 불편하다. 거대한 세월호가 귀한 아이들을 끌고 물속으로 들어갈 때 바다와 하늘에서 영상을 찍으며 빙빙 돌던 ‘국가직 공무원’ 해경의 민낯을 잊을 수 없기에 더 그렇다.

문재인 정부는 헌법 수호의 책무를 소홀히 한 박근혜 정부의 파멸을 딛고 들어섰다. 과연 이 정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가. 그걸 짚어보는 게 먼저다.

강주안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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