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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후보, 여론조사 이기고도 완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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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1일 전당대회는 한나라당 역사상 가장 뜨거웠다. 분위기는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시장의 대리전이었다.

빨간색 재킷 차림의 박 전 대표는 대의원들과 함께 일반 관람석에, 연두색 넥타이를 맨 이 전 시장과 손학규 전 지사는 당직자석에 자리를 잡았다. '민심 대장정' 중인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수염을 덥수룩이 기른 채였다. 첫 연사로 나선 강재섭 후보가 "2년 전 탄핵 열풍 때, 국회의원 50석도 못 건진다고 할 때 박근혜 의원이 당 대표가 돼야 한다고 총대를 멨다. 박 대표를 위해 저를 버렸다"고 말했다. 벼락과 같은 박수가 터졌다. 일곱 번째 연사로 나와 "대리전이나 색깔론 등 제 살 깎아먹는 일을 씻어내자"고 한 이재오 후보의 연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환호였다. 강 후보 측엔 역전승의 기대감이, 이 후보 측엔 생각하기도 싫은 역전패의 불안감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 후보의 연설 때 박 전 대표가 일반 관람석에서 투표소 앞 장애인 관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체육관의 시선들이 박 전 대표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자 이 전 시장의 측근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박 전 대표 측은 "투표를 쉽게 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 것"이라고 했지만 이 전 시장 측은 "왜 꼭 이 후보의 연설 때 옮겨야 하느냐"며 맹비난했다. 이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본 이 전 시장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여론 조사에서 승리하고도 현장 투표에서 완패한 이 후보는 눈물을 삼켰다. 강 후보의 대표 수락 연설 뒤 연단에 오른 그는 "색깔론.대리전 등의 구태정치를 청산하는 데 온몸을 바치겠다"며 "한나라당이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내부분열을 조장하거나 특정후보를 대리해 당이 쪼개진다면 온몸으로 막아내겠다"고 했다. 분한 목소리로 당 내부에서의 격렬한 투쟁을 예고하는 경고성 메시지였다. 강 후보를 비롯한 신임 최고위원단 전원이 기자실을 찾았지만 이 후보의 모습은 없었다.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박 전 대표는 투표 직후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이 전 시장은 결과 발표 10분 전에 편치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박 전 대표의 위력을 실감한 이 전 시장 진영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이 전 시장은 측근들과의 저녁식사에서 "특정후보 측이 박 전 대표의 힘을 얻기 위해 대리전 구도를 만들어 황당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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