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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의 골프이야기] “독재자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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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계에서 강제 추방돼 미 하버드대학에 머무를 때였다.
1983년 7월-. JP는 뉴저지 시외에 있는 ‘블랙 베어 컨트리 클럽(Black Bear Country Club)’에서 뉴욕 거주 동포들과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거기서 생각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쳤다. 우연히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필리핀 야당 지도자며 독재자로 악명 높았던 마르코스 대통령의 라이벌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이었다.

1970년대 JP가 국무총리로 있을 때 아키노 의원은 두 차례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어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면서 정계에 재기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아키노 의원을 만났으니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오랜만의 만남도 만남이지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동병상련의 처지까지 오버랩된 탓인지 서로 한참을 신변 이야기로 옛정을 나누었다.

JP는 옛정의 회포도 다 풀기도 전에 앞으로가 궁금했다. 그의 향후 일정을 물었다. 8월 초에 하버드대학의 동양학연구회 주관 교수인 브라운 교수의 초청으로 토론회에 참석한 뒤 곧바로 마닐라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 말에 JP는 적이 놀랐다. 자신도 바로 그 토론회의 초청을 받고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기연(奇緣:뜻하지 않은 인연)치고는 기막힌 기연인 셈이다.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보스턴에서 꼭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8월 초 두 사람은 하버드대학 안에서 점심을 겸한 토론회에 참석해 다시 만났다. 이곳에서 10여 명의 회원과 현재의 아시아 정세와 앞으로의 필리핀, 그리고 한국의 현황에 대해 질의응답 형식으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다음해에 실시되는 필리핀 대통령 선거로 옮겨졌다. 미국에 망명 중인 아키노 의원이 어찌 대응해 나갈까가 토론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질문은 아키노 의원에게 마구 쏟아졌다.

미국 망명생활을 조만간 끝내고 귀국하겠다. 귀국 후 지도자가 없어 표류 중인 야당을 규합해 다음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기필코 정적인 마르코스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겠다-. 아키노 의원은 강한 어조로 자신의 포부와 속내를 밝혔다.

JP의 회고.
“그때 내가 질문을 했어요. 무슨 보장이 있기에 귀국해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는 건가. 독재자 마르코스는 절대 당신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변상 대단히 위험하게 느껴지는데 재고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지.”

아키노의 대답은 의외였다. 마르코스가 오히려 자신의 귀국을 환영하고 정치활동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할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귀국해 출마 후 자기와 정정당당한 대결로 선거 민주주의를 굳건히 다지자고 하는 서한을 몰래 보내왔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뉴욕에 머물르고 있는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 여사를 특사 자격으로 보내 재확인하도록 할 테니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고 했다. 실제로 며칠 후 이멜다가 와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갔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볼 때 아키노는 이번에 필리핀으로 귀국할 것이고 마르코스를 만난다고 했다. 한마디로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아키노가 순진해 보였다. 그런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다그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는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합니다. 마르코스의 말은 당신을 이 기회에 정계에서 제거하려는 속셈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니 귀국을 재고하는 것이 어떠냐.” JP는 아키노의 귀국을 재차 만류했다. 동석한 교수들도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키노 의원은 막무가내였다.
“물론 마르코스의 간계에 속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의 조국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세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면 필리핀은 영영 죽습니다. 비록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아키노의 귀국 결심은 예상 외로 굳건했다. 토론회를 마치고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아쉽게 헤어졌지만 그의 앞길이 여전히 걱정이 됐다. 과연 독자재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JP는 아키노와의 만남이 있은 후 8월 중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일본 국회의원 100여 명이 공동으로 초청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이미 고인이 된 오히라 마사요시 전 총리(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JP와의 회담에서 문제의 핵심이었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한 당시 외무대신)와, 친한파로 JP와 격의없이 지내면서 총리 경합에까지 올라섰던 나카가와 이치로 농림대신을 조문하려고 귀국길에 일본 도쿄와 북해도를 방문했다.

친구인 나카가와 농림대신의 고향인 북해도 방문 중에 기막힌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83년 8월 21일 . JP는 아직도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다. 이날 낮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 JP는 숙박 중이던 홋카이도의 한 호텔에서 TV를 무심코 켰더니 바로 그때 아키노 의원이 군복을 입은 괴한에 의해 마닐라 공항 트랩에서 사살되는 광경이 그대로 방송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때 내 눈을 의심했어요. 한참 동안 눈앞이 깜깜했지요.”

JP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집스럽게 귀국길에 올랐던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은 마닐라 공항에서 백주 테러에 의해 무참하게 사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슬프고 답답한 심정을 달랠 길 없었다. 주변이 깜깜해질 때까지 도야고 해변을 방황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의 죽음으로 받았던 충격을 달래볼 겸해서 일본의 유명한 피서지 가루이자와에 내려와 재일동포 몇 명과 골프를 치게 됐다. 그것이 인연이 돼 그 후 이곳에서 매년 8월 1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정기적으로 골프 우정을 다지게 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루어질 그날의 골프 우정도 올해로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피서지답게 여름에는 25도 정도로 골프 하기에 좋은 곳이다.

“83년은 우울한 한 해”

“아키노 의원의 백주 테러 사살 소식을 접했던 83년 그해는 정말 내겐 큰 사건의 연속이었어.”
일본에 체류 중이던 9월 1일 오전 7시쯤-. TV를 보다가 또 충격적인 뉴스에 아연 경악하게 됐다. 뉴욕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기가 소련 사할린 남단에 위치한 미네란 아일랜드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격추돼 승무원과 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나. 소련이야 무도한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소련은 왜 한국 여객기만 격추하는가(그 전에 파리를 떠나 서울을 향한 KAL 707기에 총격을 가해 무르만스크에 추락한 사건) 하고 울분을 터뜨리면서 한참을 정신 잃은 사람이 됐었어요. 그나마 시간이 가면 망각이라는 미학이 있어 다행이었지. 그게 없다면 인간은 존속이 어려울 거예요. 소련은 망하고 러시아로 변존하고 있지만 그들이 한 짓이 무엇입니까. 김일성 일당을 무장시키고 6·25전쟁을 일으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강요했던 소련이 KAL기 정도 격추하는 만행은 큰 일도 아니에요. 그러나 망각이라는 묘한 인간 미학은 구원(舊怨)을 잊고 수교하고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그 나라를 찾아다니고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충격의 83년은 우울했지만 그 다음해는 괜찮았다.
84년 초여름 예일대학에서 초대해 왔다. 베니 굿맨이 클라리넷 독주회를 하니 오라는 것이다. 당시 뉴욕에 있던 나는 기꺼이 코네티컷으로 갔다. 당시 한국인 교수가 몇 명 있었는데 좀 일찍 도착하면 낮에 구내에 있는 골프 코스에서 같이 운동을 즐기고 저녁 음악회에 참관하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전에 학교에 도착해 교수들과 골프를 쳤다.

JP 일행 앞에 한국 학생 한 조가 골프를 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패스해 주면서 서울에서 왔고 경영학을 전공하는 동료들이라면서 깍듯이 인사하는 것 아닌가.

“내심 미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예절이 밝은 것을 보니 양가 자제들이구나 하고 감탄했는데 그들의 예절은 가정교육 탓일 거라고 여기면서 유쾌해 했던 기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오후 늦게 비가 강하게 쏟아졌는데 베니 굿맨 클라리넷 독주를 들으려는 인파가 우중에 정연하게 줄 서 있는 것을 보며 역시 문화인들이구나 하고 또 감탄을 했죠.”

당시 세계 최고의 클라리넷 연주자로 이름난 베니 굿맨의 나이는 84세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남짓 피아노 반주와 함께 힘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끝나고 무대 위로 안내돼 인사를 교환했는데 그는 나에게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지만 그 후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다행히 세기적인 클라리넷 연주자를 직접 대하고 영혼의 라이브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니 베니 굿맨 같은 이의 클라리넷 연주를 들을 수 있었잖겠습니까. 살아있다는 게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행복인 것 아닙니까. 허허….”<다음호에 계속>

이코노미스트 이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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