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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손' 들어가 감금·암매장···난 10년 고초 겪은 '신사임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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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 18일 경북 경산의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생산공장에서 5만원권 전지에 홀로그램을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8일 경북 경산의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 생산공장에서 5만원권 전지에 홀로그램을 부착하고 있다. [연합뉴스]

10년이 순식간에 흘렀다. 위인전에나 등장하던 내가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세상 곳곳을 주유했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사람들의 기쁨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도 숨죽여 지켜봤다.

[하현옥의 금융산책] #82%가 경조사비 봉투에 나를 쏙~ #지폐 제조비도 연 600억 아꼈다지 #이제까지 186조원 찍었다는데 #마늘밭에 묻힌 건 얼마나 될지 …

그렇다고 나의 나날이 평온했다고 여기면 착각이다. ‘검은 손’의 수중에 들어가 감금과 암매장을 당하는 고초도 겪었다. 나,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거친 여자다. 이른바 ‘신사임당’으로 불리는 5만원권이다. 오는 23일이 내 10번째 생일이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물가가 오르며 고액권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내가 나왔다고 한다. 2009년 6월 23일 세상과 처음 만났다.

한국 지폐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인 그가 모델로 등장하며 논란도 많았다고 하더군. 어쨌든 5만원권의 얼굴이 된 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잘 알고 있겠지만 그의 아들은 5000원권의 모델인 이율곡이다. 아들과 닮았다 보니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다고 들었다. 한 잔 걸치고 거나해진 취객들이 아들(5000원권) 대신 그를 건네거나 경조사비 봉투에 그 대신 아들을 넣기도 했다지.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의 10년을 풀어보려 한다. 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세상으로 나간 5만원권은 37억1878만장, 금액으로는 185조9392억원 어치다. 물론 이 돈이 다 시중에 돌아다니지는 않지. 망가지거나 병들어 돌아오기도 하고 사망선고(폐기)를 받기도 하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시중에서 유통되는 은행권 열 장 중 네 장꼴이 나다. 전체 유통 은행권(장수 기준)의 36.9%로 1만원권(27.85%)을 앞질렀어. 액면가가 높다 보니 잔액 기준으로는 84.6%를 차지한다더군. 10년 만에 ‘지폐의 왕좌’에 오른 셈이야.

내 얼굴을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경조사 자리야.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에서 내 인기는 하늘을 찔러. 지난해 한은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의 82.4%가 경조사비로 5만원권을 썼다고 해. 부모님 용돈이나 세뱃돈 같은 개인 간 거래(50.7%)에서도 내가 등장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어. 때문에 내가 경조사비 상승을 부추겼다는 비난도 들어. 씀씀이를 키웠다는 거지. 내 입장에서 그런 비판은 좀 억울하지만.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사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은 이게 아냐. 나에게 붙어있는 ‘지하경제의 주범’이란 꼬리표야. 시중에 유통되는 은행권 중 가장 고액권인 탓에 탈세와 돈세탁 등에 내가 동원돼서지. 세무조사를 할 때마다 나를 숨겨둔 이야기가 보도되고 온갖 황당한 일이 언론에 오르내리니까.

2011년 전북 김제의 ‘마늘밭 돈다발’ 사건이 대표적이야. 인터넷 도박 사이트로 거액을 챙긴 범인이 5만원권 다발로 110억원을 묻어뒀다가 발각됐지.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금고 등에서 잠자고 있는 5만원권도 상당하다고 해. 그 근거가 5만원권의 낮은 환수율이야. 2014년 25.8%까지 떨어졌던 환수율은 지난달 66.6%까지 올라갔어. 90%가 넘는 다른 은행권과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편이야. 금고에 ‘감금’되고 마늘밭 등에 ‘암매장’돼 있을 ‘또 다른 나’도 많다는 말이지.

내가 태어난 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내 덕에 한은은 매년 600억원가량의 은행권 제조 비용을 줄일 수 있었어. 돈을 찍어내고 유통하고 보관하는 비용을 줄였다는 거야. 사실상 ‘일회용’이었던 10만원권 자기앞수표의 발행도 급감(2008년 9억3000만장→2018년 8000만장)했어. 자기앞수표에게는 미안하지만 사회적 비용을 줄인 거야.

파란만장했던 10년을 살아냈지만 앞으로의 10년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경쟁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잖아. 한때 경쟁자였던 신용카드는 오랜 친구 같아. 언젠가 전자화폐나 암호화폐가 나를 밀어낼지도 모르지.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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