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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질문 안 받는 박상기, 기자 없는 회견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정진호 사회팀 기자

정진호 사회팀 기자

12일 오후 법무부 정부과천청사 브리핑룸에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들어섰다. 기자들이 앉아있어야 할 자리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법무부·검찰 출입 기자단이 브리핑 내용에 대한 보도를 거부하면서다. 이날 박 장관은 검찰 과거사위원회 활동과 관련해 법무부의 입장을 밝혔다.

출입 기자단이 단체로 브리핑을 ‘보이콧’한 건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법무부의 일방적 통보 때문이다. 이날 법무부는 장관 브리핑 80분 전인 오후 1시 10분쯤 “장관 발표 이후 별도의 질의응답은 하지 않을 예정이다”며 “관련 질문이 있으면 대변인과 홍보담당관에게 질의(가능한 문자로)하면 답변하겠다”고 공지했다. 사전 협의는 없었다.

박 장관이 질문을 받지 않는 이유에 대해 법무부는 “브리핑 자료에 충분한 내용이 담겨있고 대변인을 통해 현장에서 질의응답 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직접 답변을 해달라는 요구는 끝까지 통하지 않았다. 박 장관이 브리핑룸에서 약 10분 동안 따라 읽은 만들어놓은 자료 외에는 추가 설명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날 브리핑 주제였던 과거사위와 관련해 각종 잡음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하면서도 질문을 받지 않아 국민적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수차례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있는 춘추관에서 질의응답을 사전에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기자회견 전에 질의 순서와 내용을 정해놓고 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국민들은 잘 짜인 한 편의 각본보다 솔직한 대화를 원한다”고 꼬집었다.

12일 열린 과거사 진상조사활동 종료 브리핑. 기자들은 박상기 장관이 질문을 안 받겠다고 하자 브리핑을 보이콧했다. [연합뉴스]

12일 열린 과거사 진상조사활동 종료 브리핑. 기자들은 박상기 장관이 질문을 안 받겠다고 하자 브리핑을 보이콧했다. [연합뉴스]

박 장관의 침묵이 문제 되는 건 지난달 31일 활동을 종료한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를 두고 여러가지 비판이 나오고 있어서다. 과거사위 관련자에 대한 검찰 고발과 손해배상 소송까지 잇따르고 있다. 과거사위는 검찰권 남용 진상규명을 위해 법무부 산하에 설치됐던 기구다. 김갑배 전 위원장을 비롯해 과거사위 위원 9명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것도 법무부다.

과거사위는 2017년 12월 “진정한 과거사 반성을 통한 법무·검찰의 제자리 찾기”라는 출범 취지를 밝혔으나 그 성과엔 의문을 남기고 있다. 과거사위의 수사 권고 이후 이뤄진 검찰 수사 결과 곽상도 자유한국당 의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과거사위는 곽 의원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으면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경찰 수사에 외압을 넣었다고 발표했으나 검찰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또 검찰은 과거사위에 의해 건설업자 윤중천씨를 스폰서로 뒀다는 의혹이 제기된 한상대 전 검찰총장,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 등 전직 검찰 간부도 수사할 만한 단서가 없다고 밝혔다. 과거사위가 “과거 청와대와 검찰에 잘못이 있다”는 결론을 내면서도 충분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날 기자들은 박 장관에게 이런 사항들을 묻고자 했다. 국민들의 관심이 큰 사안인 만큼 국민들이 알고자 하는 바를 대신해 질문하고 답변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박 장관은 끝까지 자신이 준비한 자료를 일방적으로 읽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같은 박 장관의 ‘불통’은 단지 기자단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정진호 사회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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