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이 만난 사람] 이부영 "부처 국·과장까지 청와대만 쳐다보게 하면 반드시 실패"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이부영(77)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4년 전 정계를 은퇴했다. 그런데 더 바쁘다. 지난달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쪽 작은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열심히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주 25일은 양평에서 몽양 탄생 133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그는 고(故) 강원룡 목사의 권유로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과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3월 1일부터 9개월간 ‘은빛순례단’으로 전국을 돌았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권력 집중 #청와대 나서고, 내각은 뒤치다꺼리 #이래서는 문재인 정부도 불행해져 #개헌 필요 #제왕적 대통령제 유지돼 계속 실패 #총리에게 권한 이양 등 분권화 해야 #편향 심화 #과도한 이념 지향적 난폭성으론 #남북관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어

“우리 강토에 역사적 의인들의 흔적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임진왜란 때 의병 항쟁, 몽골 침략 때 저항지…. 정부가 모든 걸 다 할 순 없어요. 그러나 최소한 일본 강점기, 한국 전쟁 전·후에 있었던 일, 5·18하고 4·3처럼 큰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사과하고, 풀고… 그게 시작이라고 봤어요. 어디를 가나 같은 동네에서 서로 말도 안 하고, 잔치에 부르지도 않고, 이런 경우가 많아요. 그걸 다 풀어줘야 해요.”

‘박종철 사건’ 은폐 폭로해 6월 항쟁 이끌어

지난해 그는 특히 주목을 받았다. 영화 ‘1987’ 때문이다. 그는 수감 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축소를 폭로해 6월 항쟁으로 이끄는 핵심 역할을 했다.

“70년대 중반부터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교도관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87년 영등포 교도소에 나하고 가장 가까운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이 있더라고. 어느 날 안유 보안계장이 날 일부러 불러냈어요. 영화하고 조금 다른데, 그가 이런 얘길 해요. ‘형, 큰일 났어. 이러다가 나라 망하겠어.’ ‘무슨 소리야?’ ‘아니, 사람을 죽였으면 밝히고 끝내야지, 계속 왜곡하고, 조작하고. 진범들은 따로 있는데, 너희만 희생되라고 하니까 못한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사건을 조작하면 국민이 누구를 믿겠어.’ 분해서 못 견디겠다고 덜덜덜 떨면서 말하더라고. 진짜 범인이 3명이 더 있다는 거예요.”

그는 면담 기록을 다 없애고, 그 얘기를 안 들은 것으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적어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친구인 김정남 전 청와대 교문수석을 거쳐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했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28일 ’역대 대통령이 모두 권력이 과다해 실패했다“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대통령들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헌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6월 항쟁의 주역이면서도 그 결과를 상당히 박하게 평가하시던데.

“운동하는 사람 중에는 ‘죽 쒀서 개 줬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죠. 80년 서울의 봄에도 그랬지만 87년 6월 항쟁이 끝난 뒤에도 양김(김영삼·김대중)씨는 자기들에게 기회가 왔다고만 생각했지,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갈 건지는 준비가 안 돼 있었단 말이죠. 교도소에서 보니 단일화가 되느냐 아니냐, 쪼개질 것이냐 아니냐, 그저 민주화의 성과를 쟁탈할 생각만 하더라고요. 국민은 죽도록 싸워서 민주화를 쟁취했는데….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다, 임기를 단일 5년으로 한다,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고. 그렇게 나온 것이 87년 헌법이에요. 참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당시 노태우 쪽 김종인 박사가 그나마 집어넣은 게 경제조항이에요.”

수감 중이던 사람들은 실망이 컸겠어요.

“그해 7월 나하고 김근태(전 의원)는 석방이 안 됐어요. 양김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풀어 놓은 거예요. 그 상태로 대통령선거를 하면 결과가 뻔하잖아요. 젊은 친구들이 벽을 주먹으로 쳐서 주먹이 다 나가버렸어요. 울고 밥도 안 먹고. 나와 보니까 계속 학생들, 노동자들이 (분신해) 죽는데… 분열에 관여 안 했다고 88년 4월 나를 장례위원장을 시켰어요. 그런데 그 장례식에 양김씨가 총선 선거운동 하러 온 거예요. 내가 그랬어요. ‘여기를 어떻게 오십니까. 두 분이 분열해서 민주화가 좌절해 이렇게 죽었는데,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이런 데 오시지 말아야 합니다.’ 양김이 당권과 대권으로 나눠 맡았으면 많은 문제를 민주세력의 이름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봐요. 뿔뿔이 흩어진 것을 재건해 달라고 해서 만든 게 전민련인데 이미 노동세력, 농민세력, 이런저런 세력들이 자기 완결성을 가지고 치고 나올 때란 말이에요. 통제가 안 되더라고.”

그래서 실패하셨군요.

“거기에다가 89년에 일이 많았잖아요. 울산에 현대중공업 대파업이 있었고, 그와 겹쳐서 전민련 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하셨고….”

전민련 의장인 그는 현대중공업 파업 제삼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문 목사 방북에 대한 불고지죄도 적용됐다.

“내가 구속될 때 야 3당이 모두 오케이 했어요. 3김이 다 이제 자기들이 체제 안에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니 재야는 간섭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 이거지.”

87년 체제 주역으로서 새로운 체제로 바꾸는 개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히 바꿔야죠. 아까 말했듯이 87년 체제는 독재시대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을 직접 뽑도록 한 것 말고는 바뀐 게 없어요. 유신헌법이나 5공 헌법 그대로 제왕적 대통령제여서 계속 실패만 한단 말이에요.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와 비슷해요. 대통령과 수석회의만 있고, 총리는 대독총리, 내각은 그 사람들 뒷바라지나 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고. 난 문재인 대통령 정부에서도 다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봐요. 역대 대통령이 권력이 부족해서 레임덕이 오고 망했느냐. 권력이 너무 한쪽으로 몰려있기 때문이란 말이에요. 분권화하고 국회에 권력을 나눠줘서 국민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해야 해요.”

88년에 바뀐 소선거구제도 민주-반민주 구도를 영호남 대결 구도로 바꾸는데 큰 요인이 된 것 아닌가요.

“그렇게 악화했죠. 87년 대선, 88년 총선 치르고 나니까 떡시루를 4쪽을 내놓은 거예요. 진짜 나라를 분열시키는 선거지…. 의원 정수를 350~360명 정도로 늘려서 전문가들을 받아들이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권역별로, 석패율까지 한다면 한 지역을 어느 한 당이 독식하지 않게 되는 거죠. 사표도 상당 부분 줄어들어 민심에 거의 가깝게 의석을 나눠줄 수 있다고 봐요. 더 중요한 건 4~5개 정도의 정당이 국회에 포진해야 양쪽으로 나뉘어 죽자 살자 싸우는 정치가 아니고 연합정치, 타협의 정치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어요.”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은 28일 "과도한 이념 지향적인 난폭성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 남북관계를 옳게 가지고 갈 수 없다"면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해 4~5 개 정도의 정당이 국회에 포진해야 양쪽으로 나뉘어 죽자 살자 싸우는 정치가 아니고 연합정치, 타협의 정치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대통령이 개헌안을 내는 바람에 개헌의 동력이 떨어져 버렸어요.

“역대 정권이 처음에는 다 개헌한다고 하는데, 조금만 지나면 반대해요. 문재인 대통령도 처음에 개헌 얘기를 하다가 역시 또 거둬들여 버렸어요. 문 대통령은 4년 중임제를 말하는데 대통령 권력이 너무 과다해서 역대 대통령들이 실패했어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대통령들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헌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원제 정부에 버금가게 모든 걸 총리에게 넘기는 겁니다. 정 그렇게 못하겠다면 총리에게 조각권을 부여하고, 청와대가 그걸 간섭하지 말아야 해요. 청와대 수석 비서관은 비서들입니다. 왜 장관들이 누군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려요? 심지어는 장관들이 각 부처 인사를 못 해서 국장·과장까지 청와대만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이러면 장관이 일할 수 있어요? 이래서는 문재인 정부가 반드시 실패하고 맙니다. 이전 정부하고 똑같이 불행해져요. 내년 총선이 지나면 그냥 레임덕이에요. 그 전에 어찌 됐건 개헌하고 선거법 개정하고, 그 업적이라도 남겨야 해요.”

87년 체제 직선제 말고 바뀐 게 없어

안기부(현 국정원) 문제를 계속 건드리다 미운털이 박혀 고생하셨는데….

“제 정치 생활에서 가장 회한으로 남는 게 국가보안법 개정 실패예요. 2005년 열린민주당 의장 때 국가보안법 폐지가 당론인데, 여당 의원 151명 중 67명이 폐지를 반대했어요. 저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나 합의했어요. 남북 간에 회담도 해야 하니까 찬양·고무·회합·통신 같은 독소조항만 없애자. 한나라당 의총은 승인했어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는 협상에 참여했던 천정배 원내대표가 반대한다며 나가고, 다른 일부 의원도 가세했어요. 결과적으로는 그걸 한 자도 고치지 못하고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려는 종북당, 친북당이 돼버리고, 당은 두 쪽 나버렸죠. 그 사람들은 아무 책임을 안 지고, 나를 배신자로 몰았어요. 어떻게 모든 걸 한 번에 다 얻느냐고요. 과도한 이념 지향적인 난폭성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남북관계를 옳게 가지고 갈 수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원로가 사라지고 있는 것도 걱정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도 편향성이 심해지는 거야. 똑같이. 서울시청 앞에서 5·18행사하고 가다 고등학교 선배들을 만났어요. 학식도 있고, 사업도 크게 하는 분들인데, 완전히 이상하게 된 거야. ‘문재인이 빨갱이’라는 거야. 아니 국민 과반수가 빨갱이한테 표를 던졌단 말이오. 태극기 부대 나온 사람들도 다 똑똑해요. 그런데 자기하고 비슷하지 않으면 인정을 안 해. 조금 북한하고 공존하자고 하면 그냥 빨갱이야.”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이 지난해 1월14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31주기 추모식에서 은폐 축소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추모사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민련 상임의장 등 맡아 민주화 투쟁, 수차례 옥고 치러

이부영 위원장은 김근태·장기표와 함께 80년대 대표적인 재야 민주투사였다. 민통련 사무처장, 전민련 상임의장 등을 맡아 민주화 투쟁을 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이기택·노무현 등과 꼬마민주당을 만들며 정계에 입문해 92년 14대 국회부터 강동 갑에서 내리 3선을 했다. 95년 김대중 총재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하지 않고 노무현 의원 등과 통합민주당에 잔류했으며, 신한국당과 합당한 한나라당에서 원내총무와 부총재를 지냈다.

그는 94년 김일성 조문을 주장해 파문이 일었고,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6·15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색깔론을 반대했다. 2003년에는 ‘독수리 5형제’와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해 당 의장을 맡았다. 2015년 정계를 은퇴했다.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아일보 해직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