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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현장 몰라" 노동계 "김용균 없다"…모두 불행한 김용균법

중앙일보

입력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의 노제가 지난 2월 열렸다. 김용균씨의 영정이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의 노제가 지난 2월 열렸다. 김용균씨의 영정이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화학업체 A사 연구개발(R&D)부서에 근무하는 김모 연구원은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개정안(이하 개정안)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에 사업상 기밀인 화학물질의 이름과 용량 등을 기록하고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도록 규정이 바뀌어서다. 김 연구원은 “명칭 등을 적어 제출하도록 한 것은 보안이 중요한 신제품 ‘히든카드’를 공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MSDS는 화학제품이나 물질의 성분, 특성, 취급 주의사항 등을 소개하는 자료다. 원래는 사업장에 비치하도록 했지만 개정안은 고용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사업상 기밀 유출이 우려되면 구성성분 이름과 함유량을 비공개로 해달라고 고용부에 요청할 수 있지만 이때도 다른 방식으로 이름과 함유량을 써야 한다.

하청노동자 고(故) 김용균씨 사고로 논의가 시작된 산업안전법 개정안 시행령의 입법예고 기간이 지난 3일 끝났다.
경제계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항목을 지적하며 수정을 건의했고, 노동계는 “김용균법에 김용균이 빠졌다”며 반발하고 있다.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법’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4일 개정안에 대한 건의사항을 고용노동부에 전달했다. 경제계는 현실과 동떨어진 MSDS 규제 외에도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작업중지 명령 부분이 대표적이다. 개정안은 사업장 전체에 작업중지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작업중지명령의 요건과 범위를 ‘급박한 위험’ ‘불가피한 사유’ 등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정조원 한경연 고용창출팀 팀장은 “규정이 모호해 감독기관이 자의적으로 작업중지명령을 할 수 있다”며 “불가피한 경우에만 작업중지명령이 내려지도록 요건과 범위를 구체화하는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청업체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장소의 범위가 불명확하다는 지적도 있다. 개정안은 원청업체의 책임 범위를 ‘도급인(원청업체)이 지배·관리하는 장소’ 중 산재 발생 위험장소라고 명시하고 있다. ‘지배·관리’하는 장소에 대한 기준이 불분명하니 구체화해달라는 게 경제계의 요구다.

한경연은 “어느 장소에 안전보건조치를 해야 하는지 판단이 어려워 원청업체가 관련된 장소 대부분이 책임 대상이 되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고(故) 김용균씨의 운구행렬이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노제를 마친 뒤 민주사회장 영결식이 열리는 광화문 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김용균씨는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뉴스1]

지난 2월 고(故) 김용균씨의 운구행렬이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노제를 마친 뒤 민주사회장 영결식이 열리는 광화문 광장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김용균씨는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뉴스1]

노동계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제2의 김용균씨 사고’를 막자는 취지에서 개정안 논의가 시작됐는데 도급 금지 업종에 일부 화학업종만 포함돼서다. 하청 노동자 김용균씨는 컨베이어벨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김용균 빠진 김용균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광일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은 “컨베이어벨트 작업장이 너무 많아 모두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는 없다는 게 고용부와 경제계의 입장이었다”며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컨베이어벨트 작업 등 다양한 위험 업종이 모두 빠져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제계, 노동계 모두 불만족하는 개정안이 나온 것에 대해 정부의 ‘몸 사리기’식 법 개정 논의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고용부의 개정안 설명회에 수차례 참석한 노동계 인사는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항목은 고용부가 노사 모두 반대할 것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중간값을 던져주는 것처럼 느껴졌다”며 “미리 결과를 정해두고 설명회를 열었던 셈”이라고 비판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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