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풍광 한 폭의 그림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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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고요한 새벽 바다에 붉은 태양이 솟는다.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만선(滿船)의 기쁨과 함께 들려오는 제주 뱃노래…. 평화로운 순간도 잠시 성난 파도와 함께 폭풍우가 몰려온다. 모든 것을 삼킬 듯한 기세다.

서귀포 기당미술관에 걸린 자신의 그림 앞에 선 변시지 화백(左). 변시지 화백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작곡된 최영섭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초연한 KBS 교향악단.


원로 작곡가 최영섭(77)씨가 작곡한 관현악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귀로 듣는 한 폭의 풍경화다. 7일 제주시 노형동 한라대학교 내 한라아트홀(831석)에서 KBS 교향악단(지휘 오트마 마가)이 초연해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30여 년간 고향 제주의 풍광을 화폭에 담아온 변시지(80) 화백 그림에 영감을 받아쓴 음악이다.

이날 공연은'2006 제주 방문의 해'와 '제주 특별 자치도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연주 도중 무대 정면에 제주의 자연 풍경과 변 화백의 작품을 담은 영상이 흘러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뒤이어 연주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함께 '음악과 미술의 색다른 만남'이었다. 생존 작가의 미술 작품을 소재로 한 창작 음악이 초연된 것은 처음이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공연이 끝난 뒤 변 화백은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보니 색다른 느낌"이라며"국내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KBS 교향악단이 내 작품을 소재로 한 음악을 위촉.초연해 줘서 기쁘다"고 했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클래식 음악감상실에 자주 들러 음악을 즐겨 들었다"며 "음악에 감동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그림을 그릴 때는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야 작업에 몰두하는 편"이라고 했다.

변 화백에 대해선 고양 어울림극장의 무대막(舞臺幕) '고양(高陽)의 봄'의 작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에 그의 작품 세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공연 이튿날 아침 개관 20년째를 맞는 서귀포시 기당 미술관을 찾았다. 변시지 화백 작품의 상설 전시실이 있는 곳으로 변 화백이 명예관장으로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파도 소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화가에게 제주 바다는 어릴 적 추억이자 제주의 역사, 풍속이다. 제주 바다와 바람, 까마귀, 말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고독, 불안, 기다림, 한(恨)의 이미지로 점철돼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60~70년대 이중간첩으로 오인 받아 안기부의 미행을 받아온 그에게 폭풍은 곧 독재를 의미한다. 그는 안기부 탓에, 현실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에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변 화백은 23세 때 일본 광풍회전(光風會展) 최고상을 수상해 현재 광풍회원으로는 최고참이다. 가족과 떨어져 30년째 서귀포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래도 매년 광풍회전에 출품할 100호짜리 작품 하나씩은 거뜬히 그려낸다.

12일부터 서울 인사동 '미술관 가는 길'에서 열리는 개관 기념 초대전에서 변 화백의 그림 40여 점을 볼 수 있다. 내년 5월부터는 그의 작품 중 '난무''이대로 가는 길'등 100호짜리 2점이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10여 년간 전시된다.

글.사진 제주=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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