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민족의 자아각성(14)|그 연원을 찾아서|조동일(서울대교수·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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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재효(1812∼1884)만큼 자기고장에서 칭송되고, 또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전라북도 고창읍내에 가보면 신재효가 살던 초가가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 말끔히 복원되어 있다.
집 앞에서 조금 가면 고창읍 성인 모양성에 이른다. 지방의 읍성으로 가장 잘 보존되어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그 성안에 신재효를 기리는 비가 2개 서있다. 그 둘만으로 부족해 집안에다 비를 하나 더 세웠다. 그 뿐만 아니다. 집과 성 사이에 신재효의 호 동리를 따서 명명한 동리국악당을 세우기 위해 거대한 공사를 하고 있다.
신재효가 왜 그렇게 칭송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3개의 비를 세운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선뜻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성안 오른쪽 옛 건물 옆 숲속 비석을 여럿 모아놓은 곳에서 신재효를 칭송한 비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을 찾을 수 있다.
앞줄에는 관찰사. 군수·현감 등의 송덕비가 떡 버티고, 그 뒷줄에 「통정대부 신공재호귀애비」가 자그마하게 서있다. 전면 오른쪽에 「근검지조 박시지인」, 왼쪽에 「군자지덕 영세불민」이라 써놓았을 따름이고 다른 말은 없다. 그 비를 보면 신재효가 「군자의 덕을 갖춘 사대부」이고 직위가 통정대부에 이르러 자랑스러운 것 같다.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의 품계다. 하지만 그렇게만 알고 돌아서면 신재효의 허상을 보았을 따름이다.
그 비는 1890년(고종27년)신재효 사후 6년이 되었을 때 고창읍 동구 밖 하거리에 세운 것인데 거기다 옮겨놓았다. 흉년에 재물을 내 기민을 구제했다고 칭송하느라 「유애비」라 했고 「박시지인」이란 문구를 써넣었다. 그러나 신재효가 자선사업가로 오늘날까지 칭송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고창군청의 서울 출장소격인 경주인을 하다가 고창에 와서 한약방을 열어 모은 재산을 신재효 자신이 이방·호장을 하면서 더 늘려 큰 부자가 되었기에 기민 구제도 하고 대원군에게 원납전을 바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얻기도 했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왼쪽 「유애비」가 있는 곳 맞은편에는 「동리 신재효 선생 추념비」가 우뚝 서있다. 글씨를 가로새기고 좌대가 높다란 신식 비이고, 1963년 「오위장 신재효 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그 단체의 이름은 「오위장」의 첫 자 만한 자로 적었다.

<부친이 고창경주인>
뒷면에 새긴 비문을 보면 「통정대부」「절충장군」「희선대부」따위의 품계를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들먹이고 「원근이 모두선생을 우러러 신오위장이라 호칭하고 있다」고 했다.
오위장은 종2품의 무반직인데 신재효가 그런 관직을 맡은 경력은 없다. 그런 관직은 돈을 내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신재효를 존경해 「신오위장」이라 불렀다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장군감이기에 그랬을 듯 한데, 사실은 전혀 딴판이다. 신재효는 결코 무인이 아니었다.
비를 다시 세워 신재효를 추념한 것은 신재효가 판소리를 애호하고, 후원하고, 지도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점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기 보다 관직의 품계를 더욱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실제로는 맡지도 않은 「오위장」이 대단한 존칭이라 하면서 신재효 이해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품계나 관직이 대단하다면 신재효보다 더 야단스럽게 숭앙해야할 고관대작이 너무 많아 비를 세울 자리가 없고 돈이 모자랄 지경이다.
신재효는 돈을 내고 품계를 받기는 했어도 원래 아전이었다. 그 점을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이 1963년의 비문에 남아 있어 초점을 흐리게 했지만 신재효는 양반이 아니었기에 판소리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신재효 집 뜰에는 1984년 세번째로 세운 비가 서 있다. 상·하단이 옆으로 길게 뻗고, 그 아래 기단이 있는 모습이라 옛날 비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난 신식 조형물이다. 이름은 「동리가비」라 하고, 김동욱 교수가 회장인 전국시가 비 건립동호회에서 세웠다. 한 몫 거든 회원들의 성명을 하단에 새겨놓았는데 필자도 끼어 있다.

<관직 갖고 양반비판>
그 비 전면에는 「고창읍내 홍문거리 투춘나무 무지기안 시내우에 정자짓고 정자겨태 포도시령 포도그태 연못이라」하고 신재효가 자기 집과 정원을 자랑스럽게 노래한 문구를 새겨놓았다. 허식은 떨쳐버리고 살아가던 모습을 실상대로 나타낸 셈이다. 신재효가 관직이 아닌 풍류를 자랑하며 재산을 털어 판소리를 돌보고 가꾸는 것을 커다란 보람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사후 1백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을 다듬은 것은 커다란 공적이다. 『춘향가』『토별가』『심청가』 『박타령』『적벽가』『변강쇠가』로 이루어진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을 개작한 작품이 남아 있어 거듭 연구되고, 평가를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경북대 서종문 교수와 전남대 정병헌 교수가 각기 1984년, 1986년에 낸 신재효 연구서는 둘 다 서울대에 낸 박사논문을 수록했다.

<대원군과 특별관계>
서 교수는 신재효가 「고창지방에서 유력하게 행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반사화의 일원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없었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노력이 판소리 정리로 나타났다고 했다.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에는 아전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하고, 아전이 지방수령 밑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도 백성을 괴롭히는 불의의 권력을 비판하는 상반된 성향을 그 내용으로 지적했다.
정 교수는 신재효가 국내외에서 심각한 동요가 일어난 위기상황을 「서민과 양반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바라보면서 사회적 지주로서의 권위와 이념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던」사고방식을 작품화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자가 약자일수 있고, 약자가 강자일수 있는 세계의 양면성을 보여주어 건실한 현실 이식을 구현했다고 했다.
아전의 지위가 자랑스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전이기에 지녔던 고민과 각성을 다각도로 작품화한 것은 자랑스럽다. 판소리 광대들을 불러 다시 마련한 사설을 가르치고, 공연하는 방식까지 지도하겠다 한 것이 판소리발전에 직접 도움이 되고 긍정적인 구실을 했던가는 의문이다. 그러나 판소리 광대를 격려하고 후원하며, 광대 노릇이 대단한 수련을 필요로 하기에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시비의 여지가 없이 훌륭하다. 『광대가』를 지어 광대는 인물·사설·득음·너름새의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풀이한 이론은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광대가』는 판소리 공연을 시작하면서 광대가 목청을 다듬고 관중을 불러모으기 위해 부르는 허두가 또는 단가의 하나다. 신재효는 그런 단가를 여럿 창작하고, 단가로서 적합하지 않은 노래도 몇 편 마련하면서 관심을 넓혔다. 특히 주목해야할 작품이 그 가운데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괘씸한 서양되놈』이라는 노래를 지어 양이의 침략을 규탄했다. 대원군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에 대원군의 투쟁노선에 대한 지지를 그렇게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무렵,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뜰을 거닐며 한 걸음에 노래 하나씩 짓는다고 한『십보가』에는 스스로의 고민이 절실히 나타나 있다. 위기가 닥쳐 「이천만 동포 생겨나서 이 세상에 다 죽을까」라고 한 대목에서 「이천만 동포」라는 말이 처음으로 분명히 쓰여 근대 민족의식의 출현을 알렸다.
동시대의 많은 양반 석학들을 제쳐놓고 신재효가 「이천만 동포」를 발견하고 그 대변자가 된 것은 시민으로서의 각성을 지니고, 누구나 읽는 국문으로 사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을 짓누를만한 크기로 동리 국악당이 완공되면 통정대부·오위장 타령이 되살아나 신재효 평가를 또 다시 헛되게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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