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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실수 반복 막는 것이 예술의 역할”…자전적 연극 ‘887’로 내한한 태양의서커스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

중앙일보

입력

자전적 연극 '887'를 들고 방한한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 이번 작품에선 배우로 무대에 올라 연기도 선보인다. [사진 LG아트센터]

자전적 연극 '887'를 들고 방한한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 이번 작품에선 배우로 무대에 올라 연기도 선보인다. [사진 LG아트센터]

“오늘날 우리는 마치 기억을 잃은 듯 살아갑니다. 50년 전, 100년 전 인류는 여러 이유로 전쟁과 재앙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같은 실수와 행보를 반복합니다. 예술의 역할은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지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로베르 르파주(62)가 “기억으로의 여정”을 앞세우고 한국을 찾았다.  27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만난 그는 “예술이 역사를 재현해 기억을 되살리고, 그럼으로써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1인극 ‘887’을 선보인다. 2015년 캐나다에서 초연한 그의 자전적 연극이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그가 직접 배우로 출연까지 한다. ‘달의 저편’(2003, 2018),  ‘안데르센 프로젝트’(2007),  ‘바늘과 아편’(2015) 등 그의 작품은 여러 차례 내한공연을 했지만, 그가 한국 무대에서 연기를 보여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887’에 대해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작품”이라며 “뇌가 기억을 위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극의 제목 ‘887’은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주소 ‘퀘백시 머레이가(街) 887번지’에서 따온 숫자다. 그는 비좁은 아파트에서 일곱 명의 대가족이 부대끼며 살았던 개인적인 추억을 끄집어내면서 동시에 계급 투쟁과 정체성의 위기로 복잡다단했던 1960년대 퀘백의 사회상을 상기시킨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소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다.

연극 '887' 공연 장면. [사진 LG아트센터]

연극 '887' 공연 장면. [사진 LG아트센터]

그는 전통적인 연극의 형식에 혁신적인 기술을 접목시켜 현대 연극의 경계를 확장시켜온 연출가다. 예술과 기술을 결합해 독창적ㆍ환상적인 무대를 구현해낸다.  태양의서커스의 ‘카’(2005), ‘토템’(2010)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니벨룽의 반지’(2010∼2012년)도 그의 연출작이다. 그는 “창작 초기에는 기술이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이야기가 잠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기술의 사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887’에선 기술들을 간소하고 시적인 형태로 연극에 접목시켰다”고 말했다.

그의 연극에 대한 기대와 애정은 각별했다. "영화 작업을 하면서 내가 무대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으며 "한 영국 기자가 '마치 실패한 영화감독처럼 무대를 연출한다'는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 평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가 보는 연극은 "무용ㆍ음악ㆍ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품고 있는 모태 예술(Mother Art)”이자 "단순한 소통(Communication)이 아닌 교감(Communion)을 나누는 콘텐트”다. 그는 “연극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이벤트이자 경험이 돼야 ‘넷플릭스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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