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부·지자체는 왜 사고 터져야 대책 내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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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신진호 내셔널팀 기자

신진호 내셔널팀 기자

25일 오후 충남 서산시 대산읍 한화토탈 대산공장에서 정부와 자치단체 공무원이 참석하는 회의가 열렸다. 지난 17일 발생한 유증기 유출사고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는 자리였다. 양승조 충남지사와 맹정호 서산시장, 환경부·고용노동부 관계자 등이 나왔다.

이 자리에서 양 지사는 “연이은 안전사고로 심려를 끼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서부권역에 전담 인력을 배치하고 사고 등에 신속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사고 발생 때 자치단체가 초동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에 권한 이양을 건의하겠다고도 강조했다. 사고 발생 8일 만에 나온 대책이었다. 앞서 서산시도 ‘환경지도2팀’을 신설, 기업에 대한 지도·감독을 강화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왜 정부와 자치단체는 사고가 나면 뒤늦게야 대책을 마련한다고 하는 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30년간 꾸준하게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제서야 문제가 심각하다며 대책을 말하는 정부·자치단체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 때문이다.

유증기 유출 사고 때 주민을 분노하게 만든 건 정부·자치단체, 기업의 안일한 대처였다. 한화토탈은 사고 발생 45분이 지나서야 소방서에 신고했다. 관할 자치단체인 서산시에 신고한 것은 1시간 45분이 넘어서였다. 화학관련 사고가 나면 해당 기업은 관할 자치단체에 즉시 신고해야 하는 규정을 어긴 것이다.

지난 17일 충남 서산시 한화토탈 공장 내 옥외 탱크에서 유증기가 분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충남 서산시 한화토탈 공장 내 옥외 탱크에서 유증기가 분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고를 받은 서산시는 부랴부랴 일부 주민에게만 휴대전화 안전문자를 통해 사고 소식을 알렸다. 한화토탈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악취가 많이 나고 있으니 외출을 삼가라는 내용이었다. 마을 방송을 통해서도 소식을 전파했지만 논과 밭에서 일하던 주민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서산시는 재난문자 발송 권한이 광역자치단체에 있기 때문에 보내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유증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주민 1000여 명이 구토와 어지러움증을 호소하며 치료를 받았다.

17일 유증기 유출에 이어 22일 오전 대산공단에서 암모니아 유출사고가 발생하자 서산시는 45분 만에 모든 시민에게 창문을 닫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안전문자를 보냈다. 주민들의 원성이 있고서야 달라진 조치다. 다행히 소량의 암모니아가 유출돼 피해는 확산하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대산공단은 울산·여수와 함께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로 꼽히는 곳이다. 한화토탈과 현대오일뱅크·LG화학 등 대기업을 비롯해 6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석유화학 관련 기업이 많다 보니 잊을 만하면 대형사고가 터진다. 2017년 3건에 불과하던 사고는 지난해 10건으로 늘었고 올해 들어서도 벌써 9건이나 발생했다. 주민들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다.

사고 발생 때 발송하는 안전문자와 전담인력 편성, 공장 관리·감독 강화 등은 주민들이 꾸준하게 요구해 온 사항이다. 그런데도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 관련 법규를 손질하고 예방활동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지자체) 약속에 신뢰가 가지 않는 이유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정부와 자치단체는 주민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주민보호는 정부(지자체)의 기본 임무다.

신진호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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