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회삿돈 17억 날린뒤 극단선택···대법, 산재 인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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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회사에 거액의 손실을 입힌 뒤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장인에 대해 대법원이 업무상 재해가 맞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제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숨진 김모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부지급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2일 밝혔다.

‘회삿돈 17억 손실’ 날벼락처럼 찾아온 감사 통보

김씨는 서울메트로에 입사한 뒤 20년 간 원만하게 회사 생활을 해왔다. 동료들과 관계도 좋았고, 서울시장과 회사로부터 6번이나 표창을 받는 등 실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악재가 들이닥쳤다. 2010년 말부터 두달 간 감사원이 서울메트로에 대해 대대적인 감사를 벌였는데, 김씨가 속한 재정팀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스크린도어 설치 시공업체에게 줄 대금을 잘못 계산해 회사가 17억의 손실을 입은 게 드러났다. 업체는 이미 폐업해 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이를 알게 된 뒤부터 김씨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심각한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사무실에선 항상 넋이 나가 있었고 밤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동료 직원에게는 “회사 사람들 모두 나를 범죄자 취급하며 욕하는 것 같다.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쳐다보면서 수군거리는 게 느껴지고 다들 손가락질 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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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앞두고 있던 승진도 물 건너 간 참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손실액 17억원을 자신이 물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었다. 그는 동료에게 “난 끝났다, 갖고 있는 것은 집 하난데 구상권 행사하면 내 인생은 끝이다”라고 말하며 깊은 좌절에 빠졌다고 한다.

2011년 11월 감사원으로부터 통보된 문책 요구서를 받자 김씨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다. 아내에게 “난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네 눈에도 내가 파렴치범으로 보이지”라며 자책했고,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거나 밤새 소파에 앉아 머리카락을 뜯는 등 심상치 않은 증세를 보였다. 결국 다음날 김씨는 등산을 하러 간다고 나간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후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 재해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

1·2심 "실수한 다른 동료들은 그 정도까진 아닌데…"

1·2심은 김씨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씨가 “평균적인 근로자로서 감수하거나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중한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함께 문책을 당하게 된 팀 동료들은 그 정도로 우울해하지 않았는데, 김씨만 특별히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했다.

대법원은 ‘업무상 재해가 맞다’는 취지로 2심 법원이 사건을 다시 판결하라고 했다. 평소 밝게 회사 생활을 했고 우울증도 없었던 김씨가 회사 일 외엔 갑자기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에 걸릴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김씨를 둘러싼 각종 상황을 원심이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고도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씨가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정신장애 상태에 빠져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대법, 자살한 사람의 처지 더 적극적으로 살피겠다는 것"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 대한 업무상 재해의 인정 범위가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과거 대법원은 회사가 스트레스를 주었더라도 그게 ‘사회평균인’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한다는 애매한 기준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김씨 사례처럼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보고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박병규 변호사(법무법인 이로)는 “자살까지 이른 사람에게 사회평균인의 ‘멘탈’을 요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도 지금까지 법원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사건에서 엄격함을 넘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온 측면이 있었다”며 “앞으로 소송 당사자를 둘러싼 상황을 좀 더 면밀히 고려하는 등 최소한 소극적인 태도는 배제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고 밝혔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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