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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인인사이트] 99년 전 결혼한 나혜석이 내건 세 가지 결혼 조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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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플랫폼 폴인(fol:in)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 2화 <나혜석: 말하는 여자가 이긴다>를 일부 공개합니다. 이 스토리북은 폴인의 웹페이지에서 15일 하루만 무료로 공개됩니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_나혜석의 소설 <경희> 中

나혜석(1896~1948) : 말하는 여자가 이긴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일간지에 소식이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던 결혼이었습니다. [사진 폴인]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불리는 나혜석은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일간지에 소식이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던 결혼이었습니다. [사진 폴인]


1.  결혼보다 공부가 하고 싶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 출생입니다. 이른바 ‘나 부잣집 딸’이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배우 나문희의 고모 할머니죠. 지금 우리와 그렇게 멀지 않다는 뜻입니다. 감이 오시나요?

나혜석의 아버지는 개명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시장이나 군수 정도. 그러니까 구한말과 식민지 시기,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관료 집안이었고, 양반 출신 지주 집안이라 수원 일대에 땅도 많았다고 해요.  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했고, 똑똑해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어요. 진명여고보 출신입니다.

자, 진명여고보를 보낸 나혜석의 아버지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을까요.

“내가 정말 딸한테 해줄 수 있는 교육은 다 시켰다. 이제 시집을 가거라.”

나혜석은 어땠을까요? 아버지 말씀 따라 시집을 가고 싶지는 않았죠.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세상을 알았으니까요. 나혜석은 진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유학을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승낙하지 않습니다.

나혜석을 도와준 것은 바로, 나혜석의 친 오빠 나경석(1890~1959)입니다. 그는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뛰어난 지식인이었어요. 도쿄 유학생 네트워크는 다 나경석의 손 위에 있다고 할만큼요. 그는 유독 나혜석을 아꼈습니다. 나혜석을 위해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합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수원의 부잣집 딸이 일본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간다. 어떤 선입견이 있죠? 친일파? 부르주아? 그리고 공부에는 관심 없었을 거다?

나혜석은 진명여고보 1등 졸업이에요. 정말 남다른 학생이었고, 미술 공부를 하고 싶어 유학을 간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굉장히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성격이었어요.

191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했는데요, 이렇게 똑똑하고 세련된 여자가 도쿄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하니 어떻겠습니까? 자신 앞에 펼쳐진 신세계를 나혜석은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당시 일본은 세계의 다양한 페미니즘 담론이 용광로처럼 섞여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여자들이 ‘우리 이대로 살아도 돼?’라며 여성의 권리에 대해 문제의식이 터져 나오던 때였죠. 미술 공부를 하던 나혜석은 여성 문제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 때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이 시대의 부인, 여성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를 주제로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3호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합니다.

이듬해 스물이 되자, 아버지에게 연락이 옵니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돌아와서 내가 혼처를 정해줄 테니까 결혼해라”.

당시 10대 후반이면 결혼을 했으니까요. 나혜석에겐 첫 번째 시련이었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결혼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를 거역할 것인가. 고민하다 아버지를 거역하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네. 학비를 끊습니다. 나혜석은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조선에 돌아옵니다.

2. ‘나의 일’을 평생의 숙제로 삼다

조선에 돌아오니, 암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똑똑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세계의 흐름을 꿰고 있는 나혜석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여성이 학교를 간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무엇을 배운들 할 일이 없다는 걸 이 때 처음, 처절하게 깨닫게 되죠.

나혜석에게 ‘일’이란 평생의 숙제였어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살 수 있지? 첫 번째는 경제적 자립입니다. 두 번째는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사람답게 나 자신의 생존을, 존재를 확인하면서 자존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 두 가지를 일체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요.

나혜석에게 딱 하나 허용된 일이 있었으니 바로 교사였습니다. 1896년생 여성들이 처음 학교를 졸업하고, 할 수 있었던 직업은 90% 이상이 교사였어요. 전공 불문으로. 또 하나는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작가’라는 직업이 있었죠. 나혜석은 여주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글 쓰는 일을 병행했고 ‘나의 여교원 시대’라는 글을 남겼죠.

이 시기에 나혜석에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 연인이자 천재로 일컬어졌던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당연히 상실감이 컸겠죠. 이 시기에 나혜석은 두문불출했는데요.

이 와중에 자전적 소설인 ‘경희’(1918)를 발표합니다. ‘경희’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자아 실현 과정을 모색한 최초의 근대 문학입니다. 도쿄 유학생 경희가 아버지로부터 ‘결혼 독촉’을 받는 이야기죠. 이 소설에 아주 인상적인 대목이 있죠.

‘경희도 사람이다. 그 다음에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저는 이 문장에 꼭 여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비롯해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넣어도 가능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나혜석은 아주 밑바닥을 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이 소설을 발표했고, 조금씩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1919년 3.1운동 때 여학생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5개월간 투옥됐고요. 나혜석은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평생 고민한 사람이었어요.

3. 나혜석이 ’모(母)된 감상기‘를 쓴 이유    

나혜석은 교토제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전도 유망한 김우영과 1920년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결혼 소식이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렸는데요. 그만큼 조선 땅이 다 알 정도로 두 사람은 유명했습니다. 나혜석은 세 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하는데요.

첫째, 평생을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해주시오.

이 조건은 김우영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만, 두 사람은 초기에 꽤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갑니다. 21년엔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선 여성 최초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열었어요. 이틀 동안 수천 명이 왔다고 해요.

바로 그 해에 딸을 낳는데요.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라고 해서 김나열이라 이름 지었어요. 이 때 얼마나 결혼 생활이 행복했는지 짐작이 가시죠. 첫딸을 출산하고 일본 외무성 관리로 만주 단둥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서 이주합니다. (후략)


폴인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표지 이미지. [사진 폴인]

폴인의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표지 이미지. [사진 폴인]

이후의 내용은 폴인의 웹페이지를 통해 15일 하루만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장영은 성균관대 교수가 쓴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는 각 분야에서 최초의 길을 걸었던 근대 여성을 조명하며 일하는 여성에게 영감과 용기를 줍니다.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 걸출한 문인이면서 승려였던 김일엽, 사회주의 혁명가 허정숙,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코스모폴리탄 천재 화가 천경자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15일 무료로 만나보세요.

폴인의 인기 스토리북을 하루에 하나씩 무료로 읽을 수 있는 무료 공개 이벤트는 17일까지 진행됩니다. 16일에는 <일을 다시 생각하다: 48인의 워크&라이프 기획자들>을, 17일엔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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