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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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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미국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 맬컴X의 원래 이름은 맬컴 리틀이다. 가족들이 백인들에게 살해된 뒤 강도죄로 수감돼 이슬람에 입교하면서 원래 성을 버렸다. 백인 주인이 마음대로 붙인 성이라는 이유다. X는 빼앗긴 흑인의 이름을 상징한다.

X의 원조는 드레드 스콧 부부다. 노예제 폐지 논란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소송(1846~57)을 낸 흑인 노예다. 글을 읽거나 쓸 수 없는 이들은 소장(訴狀)에 X라고 서명했다. 변호사가 그 옆에 조그맣게 '그의 표시(his mark)'라고 썼다.

"흑인은 미국 시민이 아니다. 따라서 연방정부나 법원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 연방의회는 연방에 속한 주들이 노예제도를 금지하도록 강제할 권한도 없다." 미국 연방대법원 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이다. 여기에 미국의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 큰 역할을 했다. 노예제 찬성 대법관을 임명하고, 대법관들에게 기각을 주문했다.

뷰캐넌은 노예제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연방의 유지를 위해 노예제 반대 소요사태를 막고 도망노예송환법을 시행했다. 무기고까지 습격당하며 소요로 전국이 들끓고, 경제공황이 닥쳐도 속수무책이었다. 재선 포기 선언으로 '레임덕'의 어원이 된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까지 자초했다.

1860년 11월 링컨이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남부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지만 뷰캐넌은 비난만 퍼부었다. 모든 부담을 링컨에게 떠넘기고 퇴임했다. 이 때문에 1933년 대통령 퇴임일을 3월에서 1월로 앞당기게 된다. '레임덕 수정조항'(수정헌법 20조)이다.

과거 대통령들은 레임덕이란 말을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며칠 전 국무회의에서 언론보도를 비꼬며 "대통령이 힘이 빠져서 그런가 걱정했다"고 했다. '속앓이'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레임덕이란 말을 자주 꺼내는 건 노 대통령 자신이다. 지난해 7월 세계 한인회장단과 만난 자리에서나 올 5월 정부혁신토론회에서도 "나는 대통령 시작부터 레임덕이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의석수를 탓하며 연정을 꺼낸다. 대통령 임기가 단임이기 때문이라며 개헌을 거론한다. 하지만 레임덕은 제도가 아니라 스스로 부르는 것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날치기와 측근 비리로 민심을 잃어 레임덕을 불렀다.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데드덕(죽은 오리)'이 될 거라던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은 퇴임 때 지지도가 68%였다.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과감한 인사로 변화를 시도한 덕분이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