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월드컵 중계 중 … 시민들은 무덤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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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과의 점심시간 때 화제는 단연 새벽에 있었던 월드컵 준결승전이었다. 미사일 얘기는 아무도 안 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사실도 오후에야 알았다."(임은하.27.여.홈쇼핑 PD)

"예전부터 '불바다' '대포동'이란 단어들을 자주 듣다 보니 이젠 면역이 생겨 미사일을 쏴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김정태.35.은행원)

5일 북한이 기습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소식에 우리 시민들은 대체로 무덤덤했다. 미국.일본 등지에서 현지 언론들이 일제히 북한의 미사일 관련 속보를 긴급뉴스로 타전하며 긴박하게 움직이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미사일 사태로 국가 비상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북한과 미국 간의 문제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슈로 여기는 반응들이었다.

특히 젊은 층에서 두드러졌다. 연세대생 박기수(25)씨는 "당장 전쟁이 나는 것도 아닌데 국민의 삶에 미사일 발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나. 주위 친구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고 말했다. 서울대생 이정은(24.여)씨는 "북한은 워낙 체제가 특이하고 외교의 기본이 통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며 "우리는 그저 그런데 외국에서 더 흥분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고 말했다.

◆ 인터넷에선 뜨거운 논쟁=북한 미사일 발사가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았다. 회사원 김영복(50)씨는 "정부에선 당초 북한이 미사일을 안 쏠 거라 하고, 군사용이 아니라 인공위성인 것 같다고도 말하지 않았느냐"며 "우리에게 어떤 위협이 되는지 판단이 안 선다"고 말했다. 미술관 직원 오진이(30.여)씨는 "예전부터 북한 핵.미사일 문제는 매번 이렇게 시끄럽다가도 곧 잠잠해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도 일부 있었다. 디자이너 전태근(35)씨는 "북한이 어쨌든 힘을 갖고 일본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통일이 되면 북한 미사일 기술이 다 우리 것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기성세대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자영업자 문경호(62)씨는 "북한 미사일이 언제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많은 사람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현실이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네티즌 사이에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북한이라도 핵 미사일을 보유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야 한다"(jungo1225)는 등의 북한 옹호론을 펴는 측과 "그동안 북한에 퍼준 대가가 겨우 미사일 위협이냐"(kwon8136)며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측이 맞섰다.

◆ 안보불감증 우려=전문가들은 정부의 일관된 퍼주기와 대북 유화정책으로 국민들 사이에 '안보불감증'이 자리 잡았다고 진단했다. 안보 위협이란 본질적 문제까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김영수 교수는 "북한의 군사적 능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으로 긴장해야 할 비상사태"라며 "우리가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세일 교수는 "국제 상황이 우리에게 매우 좋지 않은 것을 국민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번 사태에 무감각한 것"이라며 "유화적 대북정책을 추진하면서 북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해 온 정부가 국민의 안보의식을 혼란시켰다"고 비판했다.

권근영.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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