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 영국 디자이너들 "쓰레기통만 봐도 디자인 수준 알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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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인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세 명의 디자이너가 한국을 찾았다. 자국 디자인 업계에 한국의 투자를 이끌기 위해서다. 세계적 디자인 회사 탠저린의 이돈태 공동대표와 의류업체 막스&스펜서 등의 컨설팅을 해 주는 스몰프라이의 스티브 메이 러셀 사장, 그리고 디자이너 출신인 영국 무역투자청 크리스틴 로스캇 고문이 그들이다.

2박3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5일 떠난 이들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지난 4일 만났다. 이들은 "한국이 디자인에 눈을 뜨고 있다"면서도 "아직 숙제가 많다"는 지적을 잊지 않았다.

◆한국 디자인,해결할 숙제 많다=삼성전자.LG전자가 독일 레드닷 디자인상이나 미국 IDEA상 등 세계적인 산업디자인 상을 근래 휩쓴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정보기술(IT) 업종이나 일부 대기업을 중심으로 디자인이 크게 발전한 반면 산업 전반적으로 숙제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러셀 사장은 "일부 중견 대기업들의 디자인 열정은 인상적이었지만 대다수 중소업체들의 디자인 마인드는 미약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번 방한 기간에 팬택.웅진 등을 방문해 사업협력을 논의했다.

산업디자인에만 매달리는 풍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돈태 대표는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쓰레기통이나 가로등의 모양이 무미건조하다"며 "공공 디자인이 낙후돼 있다"고 지적했다. 사각형 일변도의 단조로운 빌딩 건축이나 어지러이 현란한 길거리 네온사인 간판 등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로스캇 고문은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대한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유럽인들은 한국을 잘 몰라요. 삼성.LG가 한국 기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죠. 서울 청계천이나 축구 열기 같은 걸 상징으로 내세워 한국을 해외에 알려야 합니다. 유형의 상품을 보기좋게 다듬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라 무형 이미지를 다듬는 것도 중요한 디자인이예요."

◆"디자인은 사업 그 자체"=영국은 디자인 산업 뿐 아니라 디자인 교육의 메카이기도 하다. 런던 시내에만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디자인 회사가 2000 군데 이상이다. 유럽 디자이너 3분의 1 가량이 영국에서 디자인 공부를 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교육 시스템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이 나라의 디자인 화두는 뭘까.

"기능적인 디자인을 넘어 감성에 호소하는 디자인을 고안하는 숙제를 안고 디자이너들이 끙끙대고 있다"는 게 러셀 사장의 대답이었다. 그는 미 애플의 MP3 플레이어 I-POD를 감성 디자인의 성공사례로 꼽았다.

이돈태 대표는 "'디자인이 모든 것'이라는 구호가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종전엔 제품 하나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까가 디자인 개념이었다면 이제는 회사와 비즈니스의 틀을 어떻게 잡아가느냐 하는 것으로 디자인 영역이 확장됐다는 것이다. "기업의 철학.경영전략을 털어놓으면서 기업 전체 이미지를 구축해 달라고 디자이너에 주문하는 회사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로스캇 고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브랜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자체가 디자인"이라며 "그래서 요즘은 디자인팀이 마케팅.개발 부서와 함께 하지 않으면 일이 안된다"고 강조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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