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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은 71년 전 자행된 국가폭력…민간인 희생자 재심 첫 재판

중앙일보

입력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국군에 생포된 사건 관련자들. [중앙포토]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국군에 생포된 사건 관련자들. [중앙포토]

29일 오후 전남 순천시 광주지법 순천지원 앞. 여순사건 재심대책위원회 관계자 30여 명이 “불법적인 국가폭력을 심판해 달라”고 외쳤다. 이들은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심 첫 재판을 앞두고 “불법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인권을 유린당했던 여순 학살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내려달라”고 했다. 아울러 이들은 “아무 죄도 없이 끌려가 목숨이 좌지우지됐던 무법천지의 역사를 사법부가 정확하게 직시해달라”고 촉구했다.

유족들, “국가폭력 심판해달라” #순천지법, “우리의 아픈 과거사” #체포 후 22일 만에 사형된 3명 #“민간인 내란혐의 무차별 체포”

1948년 여순사건 당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재판이 71년 만에 재개됐다. 광주지법 순천지원 형사1부(부장 김정아)는 29일 내란 및 국권문란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장모씨 등 3명의 유족이 낸 재심재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이날 공판준비기일로 열린 첫 재판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건물과 운동장, 산천에 아로새겨진 우리의 아픈 과거사”라며 “사건 발생 71년, 재심 청구 8년이 지나는 등 유가족들에겐 너무도 길었던 통한의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의 군인 일부가 제주4·3 사건의 진압을 위한 출병을 거부하면서 촉발됐다. 이후 정부군의 진압과 사후 토벌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의 무고한 민간인과 군·경 일부가 희생됐다. 당시 국군은 반란군에 점령됐던 여수와 순천을 탈환한 후 수백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사형시켰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29일 오후 전남 순천시 왕지동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재심 첫 재판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29일 오후 전남 순천시 왕지동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여순사건재심대책위원회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재심 첫 재판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여순사건 당시 순천에 살던 장씨 등은 반란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곧바로 형이 집행됐다. 당시 이들이 수사를 받은 절차나 재판 과정에서 입증된 증거 등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잊혀 가던 여순사건의 진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통해 재조명됐다. 2007~2008년 여순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벌인 결과 여순사건 당시 군·경이 순천 지역 민간인 438명을 반군에 협조·가담했다는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에 장씨 유족 등은 “군·경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 체포·감금해 유죄 판결이 나온 만큼 재심을 해야 한다”며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 쟁점은 당시 군·경이 장씨 등을 불법체포·감금한 사실이 증명됐는지 여부였다. 1심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내용과 증거 요지가 없고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집행된 점을 보면 법원이 발부한 구속영장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봐야 한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검찰은 “유족의 주장과 역사적 정황만으로 불법 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항고했지만, 2심 재판부 역시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며 1심 결정을 받아들였다.

지난 48년 여순사건 당시 반군 가담자를 찾기위해 수색하는 진압군. [중앙포토]

지난 48년 여순사건 당시 반군 가담자를 찾기위해 수색하는 진압군. [중앙포토]

검찰은 대법원에 재항고했지만, 대법원 역시 대법관 9대 4의 다수의견으로 재심 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21일 재심개시를 결정한 원심에 위법이 없다고 판단해 검사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이날 대법원 판결은 여순사건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 재심을 확정한 첫 사례다.

유족들은 2011년 10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 지 7년 6개월 만에 재심 확정판결을 이끌어냈다. 여순사건 재심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이제라도 국가의 책임을 묻는 판결로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며 “검찰도 국민과 유족들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오는 6월 24일 2차 공판준비기일을 열고 사망한 재심 청구인 2명에 대한 재판 진행절차를 심리한다.

순천=최경호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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