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 - 연극] ‘패왕별희’의 성공이 던진 화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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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호 31면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얼마 전 막을 내린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사진)는 여러모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중국의 전통연극인 경극을 창극과 접목하겠다니, 재미있는 시도이지만 과연 잘 될까? 파격적인 기획은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실험적인 작품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공연의 막이 오르자마자 멋진 작품이 나왔다는 입소문에 티켓을 구하지 못한 관객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국립창극단이 실험을 선도하는 예술단체로서 정체성을 다진 지는 꽤 됐지만, 흥행을 이끄는 저력도 만만치 않음이 이번 작품으로 증명되었다. 전통 장르를 기반으로 하는 단체가 이런 성과를 거뒀음이 거듭 놀라울 따름이다.

장르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일련의 실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극의 무대언어를 소화할 정도로 형식적인 성숙을 일궜다는 창극의 확신은 파격적인 실험을 가능케 한 동력이 되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패왕별희’ 장면은 이러한 자신감이 섣부른 오만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정통 경극으로 보았을 때는 오히려 데면데면하던 이 장면에 절절한 창이 덧붙여졌을 때 패왕과 우희의 이별은 비장한 영웅의 비극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전통적인 창은 어떤 텍스트와 만나도 강력한 감정을 발휘하는 보편적 음악임을 보기 좋게 증명한 셈이다. 창극으로 노래하는 배우들이 경극의 움직임에 노련해지기까지 쏟아부은 노력이 그들의 연기에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데, 이런 배우들의 역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결과이다.

패왕별희

패왕별희

‘패왕별희’의 성공은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동안 국립창극단은 새로운 창극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실험적인 시도를 지속해왔다. 그중에는 파격에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도 있었지만 무모함에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국립창극단의 진짜 성과는 실패의 위험을 감내하면서도 이러한 실험을 꾸준히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일지도 모른다. 시장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작품, 한 번도 검증되지 않은 작업,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시도야말로 국공립 단체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예술적 책임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국립창극단의 최근 몇 년 동안의 행보가 지니는 의미는 크다. ‘패왕별희’는 그 연속선 위에서 거둔 값진 열매이다.

이런 열매가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몇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은 방향성이다. 이건 예술가가 제시해야 할 몫인데, 실험과 도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방향성은 실험과 실패를 가늠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준 위에서만 실패의 정확한 지점은 포착될 수 있고, 의미 있는 실패 위에서만 성공의 가능성은 싹을 틔울 수 있다. 방향성이 명확하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이건 행정기관이나 공적제도가 보장해야 할 몫이다. 공연은 일회적 투자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단순재화가 아니다.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의 절대량이 필요하고, 계량적 수치가 아닌 다른 평가의 기준 역시 마련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장되어야 할 것은 실패할 수 있는 권리이다. 세 개의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일곱 번의 헛스윙을 해야 하는 법. 헛스윙 끝에 ‘패왕별희’가 안타를 날렸다. 그래서 더 반갑다.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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