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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집권당은 떡시루, 제1야당은 떡고물 차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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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불비례 선거법의 역사

[캡션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캡션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선거법 개정이 위기에 몰렸다. 정치개혁특위는 진전이 없다. 시한에 몰려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올리려 했지만, 그것마저 어려워 보인다. 선거구 획정 시한인 15일 원내교섭단체인 더불어민주당·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만났지만 이견만 확인했다. 선거법은 헌법보다 고치기 어렵다고 한다. 각 정당의 이해가 직결된다. 같은 정당이라도 소속 의원마다 이해가 다르다.

득표보다 많은 의석 차지해온 #큰 정당들 선거법 개정 싫어해 #승자독식은 대화와 타협보다 #극한투쟁, 정치의 양극화 가져와

선거법은 정치적 사변과 함께 바뀌어왔다. 기본 뼈대가 바뀐 건 다섯 번이다. 4·19혁명, 5·16쿠데타, 유신쿠데타, 신군부 집권, 6월 항쟁…. 그때마다 집권 세력 의지대로 움직였다. 대통령 권력을 강화했다.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정국 안정을 핑계로 국회의 힘을 빼 왔다. 그나마 야당의 목소리가 잘 반영된 건 1988년 개정이다.

선거법을 개정할 힘은 국회 내 양대 정당에 있다. 이번 개정 목표는 ‘국민이 표를 준 만큼 의석을 가져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민주당과 한국당 의석이 줄어든다. 표에서 보듯 그동안 큰 정당이 득표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큰 정당이 달가울 리 없다.

장기적으로는 그들에게도 승자독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 작은 바람에 대패(大敗)할지 모른다. 대화와 타협보다 극한투쟁, 정치의 양극화를 가져온다. 선거법이 바뀌어온 역사를 돌아보면 이해가 쉽다.

# 개헌 찬성 조건으로 정당공천

우리 선거법은 1구 1인 소선거구제에 단순다수대표제가 큰 기조다. 유신과 5공화국만 예외다. 미군정 때 과도입법의원이 골격을 만들었다. 과도입법의원은 처음에는 선거 연령을 23세로 하고, 월남민을 위한 특별선거구도 설치하려 했다. 투표용지에 직접 이름을 쓰게 하려 했다. 우파에 유리한 조항이다.

미군정이 바꿨다. 투표 연령을 21세로 낮추고, 월남민특별구를 없앴다. 투표용지도 막대 기호와 한글·한자를 병기해 문맹자를 배려했다. 임기는 2년이었다. 2대 국회부터 4년으로 늘었다.

6·25 직전인 50년 5월 30일 실시된 2대 총선에서 이승만 대통령 지지세력이 많이 낙선했다. 국회 간선으로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인과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기립투표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발췌개헌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54년 5월 3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처음 정당 공천을 도입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을 허용’하는 개헌을 찬성하는 조건이었다. 203개 선거구에서 자유당 후보 114명이 당선됐다. 득표는 36.8%에 불과했지만, 소선거구 다수대표제 덕분에 56.2%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해 11월 부결을 선포한 지 이틀 뒤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4·19혁명으로 내각책임제가 도입됐다. 국회도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으로 구성됐다. 민의원 선거는 소선거구제, 단순다수대표제를 유지했다. 민주당이 표를 41.7% 얻어 233석 가운데 175석(75.1%)을 차지했다. 의석률이 득표율보다 33.4%나 높았다. 무소속은 46.8%의 표를 얻었으나 의석은 49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정당은 각 1~4명에 불과해 민주당이 절대다수였다.

참의원 58명은 1구 2~8인 대선거구제에 유권자가 의원 정수의 반수 이하 후보자를 선택하는 제한연기(制限連記)투표를 했다.

# 제1당이 전국구 절반 선점

5·16 쿠데타로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국회는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소선거구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233명이던 의원 숫자를 175명으로 줄였다. 구정치인을 묶고, 국회의 힘을 빼는 조치였다. 의원 숫자를 줄이자는 여론몰이는 의심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전국구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안정의석 확보 방편이다. 의석의 4분의 1인 44석은 전국구에 할애했다. 득표율과 관계없이 제1당이 무조건 전국구 절반을 먼저 차지했다. 득표율이 절반을 넘으면 득표율에 따라 나누고, 모자라도 절반이다. 3분의 2는 넘지 않게 했다. 이 바람에 공화당은 33.5%를 득표하고도 의석의 62.8%인 110석을 차지했다.

제2당은 남은 의석 중 적어도 3분의 2를 차지하게 했다. 제1야당과의 야합이다. 역대 선거에서 집권당이 ‘떡시루’를 차지했다면, 제1야당은 ‘떡고물’을 주워 먹고 묵인해왔다. 양대 정당의 이 특권을 없애는 과정이 민주화 과정이었다. 공화당은 전국구를 지역구 지명도가 낮은 군인들의 정계 진출 창구로, 야당은 정치자금 조성 수단으로 이용했다. ‘전(錢)국구’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71년 8대 총선에서 공화당 득표율이 1.8% 떨어져 48.8%를 차지하고, 신민당은 11.7% 오른 44.4%를 차지함으로써 양당 구도가 확립됐다. 입후보 자격을 정당 추천으로 제한해 무소속 출마가 불가능해졌다. 소선거구제 다수대표제와 전국구 배분 방식 덕분에 공화당은 204석 가운데 113석(55.4%)을 차지했다.

# 비례성 역행하는 보너스 의석

유신체제에서 국회는 확실하게 무력화됐다. 1구1인 소선거구제는 1구2인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152개 지역구는 73개로 조정됐다. 여야 동반당선을 유도한 것이다. 제1야당과의 야합이다. 전체의석의 3분의 1(73석)은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했다.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한 의원이다.

공화당과 신민당은 각각 38.7%와 32.5%를 얻었으나 의석은 146(66.7%) 대 52였다. 유정회 보너스 때문이다. 임기는 지역구 의원이 6년, 유정회 의원은 3년이었다. 이런 제도 탓에 78년 10대 선거에서는 공화당(31.7%)이 신민당(32.8%)보다 표를 적게 얻었는데도 의석은 145 대 61로 2.4배나 많았다.

12·12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는 많은 야당 정치인을 묶어놓고 1중대(민한당)와 2중대(국민당), 관제 야당을 만들었다. 1구 2인의 동반당선제도를 유지했다. 전국구 의석의 3분의 2는 무조건 제1당이 차지했다. 나머지 3분의 1을 의석수 비율로 나눠줬다. 득표율 대신 의석 비율을 기준으로 바꿨다.

이렇게 해 민정당이 35.6% 득표로 276석 중 151석(54.7%)을 차지했다. 전국구 의원은 ‘정국 안정’이란 명분으로 집권당의 보너스로 취급됐다. 말만 전문성이지 대통령의 거수기였다. 득표율과 의석수의 불비례성을 더욱 강화했다.

# 여소야대의 등장

87년 6월 항쟁 이후 1구2인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꿨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여소야대(與小野大)다. 민정당이 34%를 얻어 제1당은 유지했으나 299석 가운데 125석(41.8%)에 그쳤다. 전국구를 절반 받고도 그랬다.

이를 계기로 전국구 배분 방식이 계속 바뀌었다. 92년 선거부터 제1당에 전국구 절반을 주던 제도를 없앴고, 96년 선거부터 정당별 의석 비율이 아닌 지역구의 정당별 전체 득표율을 기준으로 배분했다. 2000년부터 명칭을 ‘비례대표’로 바꾸었고, 2004년에는 1인2표제를 실시해 별도의 비례대표 투표 득표 비율에 따라 비례의석을 나누었다.

지역구 숫자는 계속 늘었다. 지역구 의원들의 목소리가 컸다. 88년 전체 의석의 4분의 1인 75석이었던 게 이제 47석으로 이름만 남았다. 인구가 적은 지역구를 살리려다 95년에는 지역구 인구 편차가 5.9 대 1까지 벌어졌다. 헌법재판소는 4대 1 이내로 줄이라고 결정했다. 또 2001년에는 3 대 1, 2014년에는 2 대 1로 위헌 기준을 제시했다. 이런 비례성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려는 노력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