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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구원왕 정우람 19G 세이브 '0', 마무리의 패러독스

중앙일보

입력

한화 마무리 정우람. 뉴스1

한화 마무리 정우람. 뉴스1

지난해 한화 정우람(34)은 35개의 세이브를 올려 구원왕에 올랐다. 하지만 2019시즌 정우람의 세이브 숫자는 '0'이다. 야구에서 세이브, 그리고 마무리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패러독스'의 사례다.

야구에서 세이브란 기록이 만들어진 건 1960년대다.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였던 제롬 홀츠먼이 마무리투수를 평가하기 위해 고안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공식기록으로 인정된 건 1969년부터다. KBO리그는 1982년 원년부터 세이브를 기록했다. 2003년까지는 구원승과 세이브를 더한 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을 결정했고, 2004년부터는 세이브 갯수만 따져 시상하고 있다. 문제는 '세이브'가 공헌도를 오롯이 반영하는 기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야구 규칙에 따르면 세이브 조건은 다음과 같다.

(a) 자기 팀이 승리를 얻은 경기를 마무리한 투수.
(b) 승리투수의 기록을 얻지 못한 투수.
(c) 0⅓이닝 이상 투구했으며 다음 중 어느 하나의 조건이라도 만족시킨 투수(1) 자기팀이 3점 이하의 리드를 하고 있을 때 출전하여 1이닝 이상을 투구하였을 경우.
(2) 아웃카운트에 상관없이 베이스에 나가 있는 주자와 상대하는 타자와 그 다음 타자가 모두 득점하면 동점 또는 역전이 되는 상황에서 출전하였을 경우.
(3) 최소한 3이닝을 효과적으로 투구하였을 경우.

올 시즌 한화는 19경기를 치러 8승을 거뒀다. 정우람이 나설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길 때는 대승을 거둬 세이브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올 시즌 정우람은 6경기에 나가 6이닝 동안 1점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브 상황은 한 번도 없었다. 동점 상황에서 나와 팀이 이기면서 구원승만 2개를 챙겼다. 너무 기회가 없어 해프닝도 일어났다. 지난달 26일 광주 KIA전에서 투구 감각을 익힐 겸 6점 차에서 등판했으나 KIA가 투수 문경찬을 대타로 내세운 것이다.

토니 라루사 감독은 데니스 에커슬리를 '최초의 9회 마무리'로 기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다른 팀들도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AP=연합뉴스]

토니 라루사 감독은 데니스 에커슬리를 '최초의 9회 마무리'로 기용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다른 팀들도 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AP=연합뉴스]

정우람의 사례는 매우 극단적인 일부분이다. 시즌을 마칠 때까지 '0'세이브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세이브란 기록, 그리고 현대 야구에서 마무리 투수의 활용도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다. 1970년대까지 마무리는 2~3이닝 정도를 책임졌다. 하지만 데니스 에커슬리가 등장한 이후 '1이닝 마무리'가 보편화됐다. KBO리그 역시 초창기엔 선동열, 구대성, 임창용 등이 '중무리(중간+마무리)'로 7,8회에 마운드에 오른곤 했다. 2000년대 이후에서야 1이닝, 길어야 아웃카운트 4~5개를 책임지는 시스템이 구축됐다. 선수 혹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이닝 마무리 투수는 효율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8,9회가 아닌 6,7회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KBO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들이 비교적 부담감 없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도 많다. 지난 3년(2016~18시즌) 동안 투수들이 거둔 세이브는 총 950개다. 그 중 동점, 또는 역전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기록한 터프 세이브는 고작 126개에 불과했다.

밀워키 특급 불펜 에이스 조시 헤이더. [EPA=연합뉴스]

밀워키 특급 불펜 에이스 조시 헤이더. [EPA=연합뉴스]

최근 메이저리그에선 구위가 가장 좋은 투수를 9회 이전에 투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밀워키 브루어스 좌완 조시 헤이더가 대표적이다. 시속 150㎞대 중후반의 빠른 공을 던지는 헤이더는 밀워키의 불펜 에이스다. 그는 지난해 이닝을 가리지 않고 2~3점 차 이내의 접전 상황에서 투입됐다. 짧게는 아웃카운트 2,3개, 길게는 2이닝 이상도 던진다. 밀워키는 헤이더의 활약을 앞세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헤이더는 지난해 전담 마무리가 아닌 선수로는 최초로 구원투수에게 주어지는 트레버 호프먼상을 수상했다. ESPN은 2016년 '세이브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여전히 국내에선 8,9회에 마무리를 넣는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경기 막판 역전패가 주는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선수들 역시 부담이 크지만 마무리를 선호한다. '세이브왕'이란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도 '홀드왕'보다는 크다. 그렇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있다. 장정석 키움 감독은 개막 전 "조상우를 9회 이전에 투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속 150㎞대 강속구를 뿌리는 조상우를 승부처에 투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도 '마무리'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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